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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낙태죄 판결 뒤집기, 우리나라의 방향은?
미국의 낙태죄 판결 뒤집기, 우리나라의 방향은? 202010321@sangmyung.kr 편집장 주유라 당신에게는 자유롭게 피임할 권리가 있다. 신체의 주인은 자기 신체에 대한 결정권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정권은 인간의 기본권이다. 인간이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 섹스를 하는 것은 벌을 받을 일인가? 그렇지 않다. 쾌락에 따른 형벌, 즉 섹스에 따른 책임을 묻는 논리는 신체의 주인이 지닌 자기 결정권을 무시하는 논리이다. 마찬가지로 여성에게는 원치 않는 임신을 중단할 권리가 있다. 여성은 인간이고, 인간에게는 누구나 자기 결정권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당연하고도 단순한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지난 2022년 6월 24일, 미국 대법원의 로 대 웨이드(Roe v. Wade, 410 U.S. 113 (1973)) 판결이 뒤집혔다. 로 대 웨이드 판결이란 1973년 미국 전역의 임신 중단을 허용하도록 한 미연방대법원의 판결이다. 그러나 미연방대법원은 임신 15주 이후 임신 중단을 전면 금지한 미시시피주법에 대해 6대 3으로 합헌 판결을 하며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낙태를 제한하면 여성과 소녀들을 위험하게 몰아가 여러 합병증, 심지어 죽음까지 초래할 것”이라며 이러한 판결을 퇴보라고 비판하였다. 또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이번 판결에 대해 ‘비극적 오류’라고 말하였다. 이처럼 미국 대법원의 판결은 전 세계에 파장을 일으키고 있으며, 이는 한국의 낙태죄 입법 논쟁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고 있다.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은 미국의 판결은 낙태죄가 헌법불합치로 결정된 한국에도 영향을 미치게 될까? 2019년 4월 11일, 한국의 헌법재판소는 헌재 2019. 4. 11. 선고 2017헌바127 결정에서 낙태죄가 헌법정신에 위배된 법률이라고 판결했다. 이전까지 한국의 낙태죄는 66년간 존속되어왔다. 낙태죄로 불렸던 형법의 조항은 다음과 같다. 형법 제269조 제1항에 따르면, “부녀가 약물 기타 방법으로 낙태한 때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라고 명시하였다. 제270조 제1항 중 낙태 시술 의사에 관한 부분에 따르면 “의사가 부녀의 촉탁 또는 승낙을 받아 낙태하게 한 때에는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라는 조항을 명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항이 담긴 낙태죄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의해 2021년의 시작과 함께 효력을 잃었다. 헌법불합치 결정이 났던 판결문인 ‘형법 제269조 제1항 등 위헌소원’은 낙태죄 조항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기낙태죄 조항은 모자보건법이 정한 예외를 제외하고는 임신기간 전체를 통틀어 모든 낙태를 전면적ㆍ일률적으로 금지하고, 이를 위반할 경우 형벌을 부과함으로써 임신의 유지ㆍ출산을 강제하고 있으므로, 임신한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제한한다. 자기낙태죄 조항은 태아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서, 정당한 입법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적합한 수단이다. 임신ㆍ출산ㆍ육아는 여성의 삶에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요한 문제이므로, 임신한 여성이 임신을 유지 또는 종결할 것인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스스로 선택한 인생관ㆍ사회관을 바탕으로 자신이 처한 신체적ㆍ심리적ㆍ사회적ㆍ경제적 상황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한 결과를 반영하는 전인적(全人的) 결정이다.” 헌법재판소가 헌법불합치 판결을 한 2019년부터 2021년의 시작까지 낙태죄가 유효하였던 이유는 2년간 사회적 혼란을 막기 위해 유예기간을 두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헌법재판소는 낙태죄 조항이 효력을 잃기 전까지 정부의 개입과 입법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낙태죄에 대한 헌법불합치 판결이 이루어진 시점으로부터 약 3년의 세월이 지난 2022년 현재, 한국 사회는 여전히 낙태죄에 대한 혼란이 이어지고 있다. 인터넷에 검색해보아도 임신중절에 대한 공적인 정보는 나오지 않고, 사람들이 임신중절을 위한 약을 불법으로 거래하는 상황도 여전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임신중절 수술에 대한 부정확한 정보를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공유한다. 이처럼 혼란스러운 상태가 3년째 지속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낙태와 관련한 혼란을 일으키는 것은 모자보건법이다. 모자보건법은 임신 중지 수술의 허용 범위를 제시한 법안이며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다. 형법에서 낙태죄는 헌법불합치판결을 받았지만, 모자보건법 상에서는 임신 중지 수술의 허용 범위를 남겨두고 있는 것이다. 모자보건법 제14조 제1항에 따르면 임신 중지 수술을 다음과 같은 경우에만 허용한다. ①본인·배우자가 유전학적 장애가 있는 경우 ②본인·배우자가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 ③강간에 의해 임신된 경우 ④혈족·인척 간 임신된 경우 ⑤본인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치는 경우이다. 하지만 모자보건법의 허용 범위를 충족하지 않은 그 밖의 임신중절을 한 경우에도 낙태에 대해 처벌을 받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모자보건법은 여전히 개정되지 않고 남아 낙태에 대한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국회는 형법 조항 수정을 위해 개정안을 발의하고 공청회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3년째 낙태와 관련한 추가 입법은 없다. 형법과 모자보건법에 관한 개정안 6건은 국회에서 계류 중이다. 현재까지 국회에 계류된 법안은 대략 1만 997건이다. 입법 공백 상태가 길어진다는 것은 임신중절과 의료 현장 등에 대한 논의가 여전히 음지에 머무르고 있다는 의미이다.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은 미국의 판결은 트럼프가 집권하던 시기에 새롭게 미 대법원에 재판관이 자리를 잡게 된 것과 연관이 있다. 즉, 이 판결은 트럼프 보수정권에 의해 나타난 것이지, 미국 전체의 의견 또는 세계 흐름 전체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다. 낙태죄는 사회의 지배계층 또는 집권당의 이념, 사회적 상황, 종교 등과 면밀히 관계를 맺으며,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일례로 루마니아는 인구 증가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독재정권이 피임과 낙태를 전면 금지하고 출산 강요 정책을 펼쳤다. 1967년 이전에는 자유롭게 낙태가 이루어졌던 루마니아이지만, 차우셰스쿠의 정책인 포고령 770에 의해 임신한 여성은 모두 출산할 때까지 정부의 감시를 받았다. ‘검은 시위’로 잘 알려진 폴란드의 경우,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나라가 파괴되어 당장 일을 할 수 있는 여성이 필요했다. 나라의 존속을 위해 여성 인구가 필요했지만, 폴란드에서는 불법 낙태로 인해 1년에 6만 명의 여성이 사망하고 있었다. 여성이 합법적으로 낙태를 하여 죽지 않고 당장 계속해서 일을 할 수 있도록, 폴란드에서 낙태는 1956년에 즉시 합법화되었다. 그러나 1993년부터 폴란드는 낙태가 다시 불법이 된다. 1993년까지 합법이던 낙태가 또다시 불법이 된 까닭은 공산 정권이 몰락하고 가톨릭 이념이 정치적으로 채택되었기 때문이다. 과거 프랑스에는 피임죄가 있었다. 가톨릭과 가부장제의 강한 압력에 의해 피임을 불법으로 규정했던 것이다. 현재 15~18세 여성에게 무료로 피임약을 지급하고, 임신중절 수술이 12주까지 합법이며 무료로 이루어지는 프랑스의 모습을 볼 때 상상하기 어려운 과거이다. 피임과 낙태는 국가의 입맛에 따라 ‘금기’과 ‘허용’을 오고 간다. 국가가 재생산 능력을 통제할 수 있게 되는 것은 강력한 정치적 도구와 정치적 힘을 쥐게 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우리는 낙태에 대해 얼마나 많은 편견을 가지고 있을까? 사람들은 흔히 사람들은 낙태가 주변에서 쉽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며, 일부 여성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가임기 여성 중 임신중절 수술을 경험한 사람은 대략 5명 중 1명꼴이다. 2022년 6월 보건사회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만 15∼49세 임신을 경험한 여성 3천519명 중 17.2%인 606명이 임신중절 수술을 경험하였다. 만 15∼44세 응답자 가운데 임신 경험이 있는 여성(2천362명)의 15.5%가 임신중절 경험이 있다는 것이다. ‘생명의 소중함은 어떡하나요?’, ‘태아는 생명인가요, 아닌가요?’ 이러한 논의의 이면에는 쾌락적 성관계에 대한 징벌의 심리가 있을 수 있다. 지난 20세기, 섹스를 통한 쾌락에 대해 죄를 매겨야 한다는 가톨릭 관념이 만들어낸 끔찍한 시설이 하나 있었다. 바로 아일랜드의 ‘막달레나 수용소’이다. 이 시설에는 약 3만 명의 여성이 수용되었으며 “몸을 버린 여자들”이라 불리는 여성들이 이곳에서 더럽혀진 몸의 죄를 씻어낸다는 명목으로 고된 노동을 하며 정신적 학대를 당했다. 여성들은 섹스를 해서, 강간을 당해서, 아기를 낳아서, 너무 예뻐서 등의 이유로 이곳에 끌려왔다고 한다. ‘막달레나 수용소’는 여성의 쾌락에 대한 징벌의 심리를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놀랍게도 이 시설은 1765년에 세워져 1996년까지 존속되었다. 낙태를 선택할 권리를 주는 것은 갓 스무 살이 넘은 여성의 방종을 부추기는 것인가? 낙태가 ‘방탕’한 ‘젊은 여성’의 무분별한 성관계를 부추긴다는 이미지 또한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국의 통계에서 임신 중절 수술을 받는 여성은 미혼자보다 기혼자의 비율이 언제나 높기 때문이다. 임신 중단을 결정할 권리는 신체의 주인에게 있다. 인간은 자기 몸에서 일어나는 일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기본권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낙태죄가 헌법불합치로 결정되고 새로운 입법과 의료보험 체계 마련 등의 과제를 앞둔 한국은 미국의 판결에 흔들릴 이유가 없다. 우리는 함께 목소리를 내며 우리의 길을 가면 된다. 낙태는 결코 죄악시되어서는 안 된다. 낙태를 하고 싶어서 하는 여성은 없고, 그럼에도 낙태는 계속해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낙태는 여성의 몸에 대한 권리이며 인생에 대한 권리이다. 그러므로 낙태는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안전한 의료 행위가 되어야 한다. <참고문헌> 우유니게(2018), 유럽 낙태 여행, 봄알람 김영신(2022), 임신중절 줄었지만 여전히 사각지대…정부·국회 대체입법 손놔, 연합뉴스, 2022.06.30. <https://www.yna.co.kr/view/AKR20220630070900530?input=1195m> 나경희(2022), 지금 한국에서 낙태는 불법인가 합법인가, 시사in, 2022.06.28.,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7593> 앰네스티 인터네셔널(2022), 낙태에 관한 주요 사실, 2022.08.08. <https://amnesty.or.kr/campaign/abortion-facts/?gclid=CjwKCAjw_ISWBhBkEiwAdqxb9s9goorBhx09yVm-tWT7zeOCk9S5_sDzzYlTrZ3vwNu61wIxaijirBoCtOcQAvD_BwE> 법제처 국가법령정보센터(2022), 형법 제269조 제1항 등 위헌소원, 2019.04.11. <https://www.law.go.kr/detcInfoP.do?detcSeq=150780> BBC NEWS 코리아(2022), 로 대 웨이드: '낙태권 보장' 미국 대법원 판결 49년 만에 뒤집혀, 2022.06.25. <https://www.bbc.com/korean/news-61934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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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좇는 사람들
꿈을 좇는 사람들 202010321@sangmyung.kr편집장 주유라 다가가려 하면 멀어지고, 그래서 관둬야겠다 싶으면 꼭 가까워지는 꿈이 당신에게 있는가?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빛이 난다고들 한다. 강렬한 열망으로 꿈을 좇는 사람, 그 사람들에게는 꼭 시련과 풍파가 함께 한다. 영화 ‘인사이드 르윈’의 르윈은 자신이 꼭 이루고 싶은 그 무엇 앞에서 끊임없이 좌절을 겪는 사람이다. 이 영화는 포크송 가수를 꿈꾸는 르윈의 여정을 다룬 이야기이다. 르윈은 아주 작은 가게에서 적은 돈을 받고 노래하는 포크송 가수이다. 그런 르윈은 유명한 포크송 가수가 되고자 유명 소속사 사장에게 자신의 음악을 들려주기 위해 추운 겨울에 먼 여정을 떠난다. 영화 ‘인사이드 르윈’을 보게 된 계기는 단순했다. 포스터에 고양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고양이는 단지 귀여움이나 주연을 능가하는 조연 정도를 담당하는 역할이 아니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어떤 영화를 보면 고양이를 영화에 영리하게 이용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가끔 마음이 씁쓸할 때가 있다. 광고에 아기나 동물을 넣으면 효과가 좋다는 말이 떠올라서다. 물론 고양이의 등장에 애묘인의 가슴은 뛴다. 하지만 고양이를 물건처럼 갖다 놓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들면 딱딱한 의자에 앉은 기분을 느낀다. 고양이를 이용한 작품을 보는 것은 숨돌리고 쉬었다 가기에 좋지만, 어딘가 어색한 자세로 앉아있는 기분을 느끼게 만든다. 어깨 근육과 척추와 엉덩이뼈 곳곳에 단단한 힘이 들어간 사람처럼 말이다. 그러나 ‘인사이드 르윈’의 고양이는 다른 작품에서의 고양이들과 조금 다르다. 영화의 초반에 등장한 고양이는 고양이의 역할을 해낸다. 고양이답게 예상치 못한 변수를 가져오거나, 날렵한 몸으로 뛰어다니다가 말랑한 몸으로 르윈의 품에 안겨있기를 반복한다. 여기까지 고양이의 역할은 귀엽고 따뜻하고 사랑스럽고 말랑말랑하며 예측 불가하게 구는 것이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될수록 고양이에게 새로운 의미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르윈은 우연히 남의 집고양이 한 마리를 떠맡게 되고, 고양이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런데 고양이는 잊을 만하면 르윈의 앞에 등장한다. 잡으면 사라지고 버리면 등장하는 것이다. 몇 킬로미터를 걸어 고향을 찾아온 고양이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의 포스터가 작중에 등장하는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고양이는 고양이라는 본질은 그대로인 채 형태를 바꿔가며 르윈의 마음을 은근히 흔들어댄다. 르윈에게는 잃어버린 수컷 고양이가 있지만, 르윈은 곧 그 고양이를 닮은 암컷 고양이를 만나기도 하며, 그 고양이를 버리자 다리 다친 고양이가 또다시 르윈의 앞에 등장한다. 그리고 처음에 잃어버린 수컷 고양이는 다시 르윈에게 돌아온다. 르윈은 끊임없이 잃어버린 고양이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다 창밖에 지나가는 고양이를 보고 자신이 잃어버린 고양이라 착각하고 잡아 온다. 잃어버린 고양이를 찾았다며 기뻐하지만, 그 고양이는 사실 잃어버린 고양이를 닮은 다른 고양이었다. 르윈은 그 사실을 알고도 고양이를 챙긴다. 사람들은 고양이를 꼭 껴안고 지하철을 타고다니는 르윈을 뚫어져라 바라보기도 하고, 누군가는 르윈에게 게이 같다고 조롱한다. 르윈은 그런 말에 전혀 개의치 않고 고양이를 들고 다닌다. 어떤 책임감, 생명 존중, 사명 의식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냥 있으니까 데리고 다니는 것이다. 그에게 고양이는 그냥 고양이다. 사랑하는 고양이가 아니라 어느 순간부터 같이 있게 된 고양이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굳이 버릴 필요는 없지 않은가?’ 세상에 처음 태어나 눈을 떴을 때 왜 내게 눈이 달렸는지 의심하지 않았듯이 말이다. 르윈은 포크송 가수로 인정받고 싶었다. 그래서 먼 길을 뚫고 유명한 소속사의 대표에게 노래를 들려주러 갔다. 돌아온 말은 상업적으로 가치가 없다는 말이었다. 몸 뉠 곳을 향해 돌아가는 길에 르윈의 모습은 만신창이다. 피곤함, 무기력함, 버거움, 서러움이 중력처럼 그를 붙잡고 아래로, 아래로 잡아당긴다. 그때 르윈은 고양이를 버리게 된다. 앞으로도 계속 마음에 담아두고 후회할 것을 알면서, 고양이의 갸우뚱한 표정을 잊지 못하리란 것을 예감하면서 말이다. 르윈의 처지에서 고양이를 데리고 다니는 일은 과분했을 것이다. 르윈에게는 돈도 희망도 없었기 때문이다. 고양이가 죽거나 말거나, 어차피 우연히 주운 길고양이였으니 마음 쓸 것 없지 않은가. 하지만 르윈의 마음은 편치 않다. 르윈이 잃어버린 고양이는 아무렇지 않게 스스로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몸을 길쭉하게 늘이고는 “야옹”하고 운다. 돌아온 고양이를 보며 르윈과 관객은 이상한 감정이 든다. 놀랍고 허무하기도 하고, 짜증이 나면서 다행이기도 하다. 르윈은 다시 작은 포크송 카페의 무대에 올라 노래한다. 다시 원점에서 노래를 부르기까지 르윈은 지난한 길을 견뎠고 꼴통 같은 자신의 추함을 견뎠다. 거지 같은 생활과 추운 바람과 무엇하나 풀리지 않는 일을 견디기도 하였다. 이 모든 것을 견디려고 마음먹은 적도 없는데도 견딘 것이다. 르윈이 그 모든 지리멸렬함을 거쳐 다시 작은 무대에서 포크송을 부를 때 르윈의 눈빛은 누구보다 많이 빛난다. 르윈은 자의로든 타의로든 포크송을 떠날 수 없었다. 포크송을 때려 치려고 마음먹어봤자, 돌고 돌아 자신에게로 오는 고양이처럼 포크송은 그에게 꼭 달라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르윈에게 고양이가, 또는 포크송이 어떻게든 르윈의 곁으로 돌아왔듯이, 열렬히 원하는 그 무엇은 다양한 모양으로 변신해가며 나에게로 다가온다. 열렬히 무언가를 원하다 보면, 그것이 내 신체 부위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대단한 작가가 되겠다고 마음을 부풀리기 전에 그저 글을 매일 쓸 때, 대단한 피아니스트가 되겠다고 다짐하기도 전에 그저 몇 시간이고 피아노를 치고 있을 때가 바로 그저 그 꿈을 묵묵히 지니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체감하는 순간이다. 포크송은 르윈으로부터 가까워지거나 멀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노래하다 벌컥 서럽고 화가 나도 다음날이면 노래했고, 퇴짜를 맞고 와서도 노래했다.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는 듯이 르윈의 곁에는 여전히 포크송이 있다. 모든 것이 르윈을 바닥으로, 바닥으로 무너뜨려도 르윈의 포크송은 아무런 표정 없이 제자리를 지킨다. 돌고 돌아 다시 포크송이다. 문득 모든 고양이가 제자리로 돌아갔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고양이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오늘은 아주 고단한 하루였어.” 꿈을 좇는 르윈도 거리를 헤맨 고양이도 모두 그저 다시 삶을 향해 걸어간다. 제자리로 돌아간 그들은 깊은 단잠을 잘 것이다. 다시 돌아간 일상이 고작 서러운 날의 연속일지라도 멈출 수 없다. 날이 밝으면 기지개를 켜고 어제보다 개운한 새 하루를 보낼지도 모르니 말이다. 고양이로 태어난 고양이는 고양이의 삶을 살아낼 뿐이다. 르윈에게 고양이는 마치 열렬히 닿고 싶어도 닿기 어려운 꿈과 같은 존재였다. 만날 듯싶으면 멀어지고, 그래서 포기하려고 하면 어느 순간 품 안에 들어오는 고양이처럼, 그렇게 꿈은 당신으로부터 가까워졌다 멀어지기를 반복할지도 모른다. 놓을 수 없이 열렬한 꿈이 있다면, 분명 그 꿈 때문에 가끔은 추해지고 지치는 날이 오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지리멸렬하는 과정을 거치고서야 다시 제자리에 돌아와 부르게 되는 포크송에는, 진하게 빛나는 눈빛이 담겨있을지도 모른다. 고양이가 제 운명을 알고 제자리로 돌아오듯이, 꿈은 분명 당신의 곁을 맴돌고 있을 것이다. 꿈을 꾸고 노래하는 당신의 눈빛이 더욱 빛나게 될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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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열녀의 죽음에 관하여
한 열녀의 죽음에 관하여 명예기자 이선우 필자는 어린 시절 외할머니께 옛날이야기 듣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명절이나 외할머니 생신 때 외가에 방문하면 항상 어떤 이야기든 들려달라고 보채곤 했다. 외할머니는 주로 당신이 경험한 삶의 일화들을 순화해서 들려주시곤 하셨다. 그러다 필자가 중학생일 때 외할머니는 오래전 이야기라며 당신이 물려받은 어떤 두루마리에 써진 전설을 지나가듯 말해주셨다. 그 이야기를 듣고 뭔가 기이함을 느꼈던 필자는 외할머니께 그 두루마리를 보여 달라 부탁드렸고 외할머니는 어디선가 오래된 두루마리를 꺼내오셨다. 적어도 백 년은 넘은 것이라며 당신이 시집갈 때 어머니에게 받은 것이라 하셨다. 난 그 두루마리를 보자마자 달라며 졸라댔고 결국 그 두루마리를 받아왔다. 그렇게 받아온 두루마리는 어렸을 때 흔히 그랬듯 집 어딘가에 두고는 금방 잊어버렸다. 그러다 작년 필자가 이사를 하게 되면서 이삿짐을 정리하다 한 나무상자 안에서 그 두루마리를 발견했다. 과거에 외할머니께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라서 이번엔 그 두루마리를 펼쳐 처음으로 읽어보았다. 여기에 쓸 글은 그 두루마리에 적혀있던 열녀 전설 ‘유열부가’에 관한 것이다. 열녀에 관하여 열녀(烈女) 또는 열부(烈婦)라고도 불리는 여성은 주로 남편을 위해 헌신하고 정성을 기울인 아내나 남편과 가문을 위해 열(烈)의 정신을 지킨 절개가 굳은 여인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에 유교가 유입된 것은 삼국시대이지만 열녀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는 고려 후기부터이다. 고려 후기 전란 속에서 정절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부인들이 대거 등장하는 데 당시 성리학을 받아들인 신진사대부들을 주축으로 이러한 여성들이 열녀로서 찬미 받고 적극 알려지게 된다. 그럼에도 조선 초기까지는 과부의 재가가 허용되고 유산도 균등분배 되었던 만큼 수절을 지킨 과부나 남편에게 순종한 부인이 열녀로 칭송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국가가 나서서 열녀가 나온 집안과 고을에 열녀문을 세우고 세금감면 등에 혜택을 부여하면서 열녀의 기준도 여러 지역이 경쟁하듯 점점 높아졌다. 그러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혼란에 빠진 조선 사회에서 사대부들은 더욱 봉건적인 예와 충절을 강조하여 사회를 안정시켰는데 그 과정에서 열녀의 기준도 더욱 상향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남편을 따라 자결한 과부나 위기에 빠진 남편을 구하고자 목숨을 바치는 정도는 되어야 열녀란 칭호를 받은 만큼 열녀는 목숨을 바쳐야 얻을 수 있는 칭호가 되었다. 지금 소개할 유열부가는 바로 그 조선 최후기에 있었던 일화이다. 유열부가에 관하여 순 한글로 쓰인 유열부가는 시집가는 후손에게 물려주어 당시 문해력이 낮았던 여성도 읽을 수 있게 되어있다. 즉 이 열녀전은 막 결혼한 부인이 읽으라고 쓰인 것이다. 덕분에 한문을 거의 모르는 필자도 내용 전체를 읽을 수 있었다. 일화를 간략히 소개하자면 이렇다. 살인죄를 저지른 남편이 죄를 다스림 받게 되자 그의 아내 ‘유부인’이 두 번의 시도 끝에 자결하여 결국 남편이 풀려나게 되었다. 남편은 그로부터 3년이 지나 출옥해 돌아와 그녀의 시신을 담은 관을 여니 그녀는 마치 자는 듯 그대로 누워있었다고 한다. 이를 보고 그와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이 통곡하니 그녀의 시신이 순식간에 백골이 되었다는 전설이다. 이 전설과 관련된 내용을 필자의 외할머니께 여쭤보니 유부인의 남편은 조상의 묫자리를 두고 분쟁하다 상대를 밀었는데 그만 그 상대가 뒤로 넘어져 죽었다고 한다. 그 내용은 유열부가에 적혀있진 않았지만, 외할머니의 말을 신뢰하면 그는 고의로 살인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었다. 필자는 이 열녀전을 여러 번 읽으면서 많은 의문이 생겼다. 우선 “유부인이 과연 온전히 본인의 의사에 따라 자결했는가”란 의문이 든다. 유열부가를 읽어보면 그녀는 자결한 후에도 시신에 혼이 깃들어 있었는데 남편과 사람들이 통곡하자 혼이 청산으로 갔다는 말이 나온다. 마치 한이 맺혀있었던 듯 사람들이 슬퍼하자 그제야 혼이 저승으로 갔다는 말은 그녀가 상당히 억울한 일을 겪었다는 뜻으로 읽힌다. 유열부가의 화자는 유부인의 남편으로 여겨지는데 아마도 출옥하고 돌아와 뭔가 자신의 부인이 억울한 일을 당했음을 감지하고 이를 은연히 글로 남긴게 아닌가 싶다. 즉 주변의 강요나 요구가 그녀의 자결에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이 든다. 둘째로 유부인의 죽음에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유열부가에 쓰인 바에 따르면 그녀는 처음에 칼을 가슴으로 향하고 바닥에 몸을 던져 자결을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이런 자결 방식은 일반적으론 실행은커녕 상상하기도 어려운 방식이다. 의문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녀가 자결 시도를 한 직후 법관과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쓰여 있지만 그녀는 다시 뒷마당 나무에 목을 매여 자결한다. 왜 사람들은 그녀의 죽음을 막지 못했을까? 그리고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고 자결할 수 있었다면 왜 그녀는 처음부터 목을 매 자결할 시도를 하지 않았을까? 그저 의심이 들뿐 그 의문의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셋째로 유부인의 자결을 알게 된 법관이 그녀의 희생을 측은히 여겨 결국 그녀의 남편이 방면될 수 있었다는데 이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다. 당시 사용되던 법전은 대전통편(유열부가가 쓰인 때는 1898년으로 사료되지만 이 전설의 배경은 그보다 20~30년 전으로 추측됨)으로 그 법전에 따르면 살인죄는 이를 저지른 죄인의 경우 왕의 최종 재가를 받아 판결이 확정되었을 만큼 부인의 희생만으로 방면될 죄가 아니었다. 또한 ’보방제도‘라 하여 친족이 상을 당할 경우 보증인을 세워 석방하기도 했으나 역시 살인죄나 강도죄를 저지른 죄인의 경우 제외되었다. 심지어 화자의 과장일 수도 있지만, 이 일화는 서울에까지 퍼져 나갔다 하니 그의 살인죄가 면책된 것은 당시엔 마치 당연한 일처럼 받아들여진 것 같다. 이 외에도 유열부가를 읽으며 여러 의문이 들었으나 추가로 알아낼 수 있는 사실은 거의 없었다. 필자가 아무리 인터넷을 뒤져도 이 열녀 전설에 관한 정보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름 모를 열녀와 이후를 생각하며 유열부가가 쓰인 시기는 본문에 ’오백연 예의지국‘이란 표현과 말미에 무술(戊戌)년이 써진 것으로 보아 1898년으로 사료되는데 필자의 외할머니에게 추가로 들었던 바로는 유부인의 남편이 나이 들어 쓴 열녀전이라 한다. 다시 말해, 이 전설은 지금으로부터 150년 전후에 일어난 기이한 일화이다. 하지만 본문 어디에도 화자의 이름이나 유부인의 실명이 나오지 않고 필자의 외할머니도 더 이상은 모르시기에 자세한 전말을 알아낼 수는 없었다. 유열부가에는 이런 가사가 나온다. “천추만세 내려가도 청산에 열부 무덤 세상이 알 터이니...” 하지만 오늘날 이 전설을 들은 대다수 사람들은 그녀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당대의 봉건적 질서에 분노할지언정 끝까지 그녀의 이름은 알 수 없고 당연히 그녀가 어디에 묻혔는지도 알 수 없다. 그녀의 죽음과 전설 같은 일화는 그저 오래된 두루마리 하나에 남아 있을 뿐이다. 또한, 이런 가사도 있다. “죽어도 살았으니 원통해하지 말고...세월이 지나면 총명 영화 하오리다” 그렇게 세월이 지났으나 아마도 이 열녀전이 전하고자 했던, 혹은 유부인이 목숨으로 지키려 했던 가치관은 이미 적폐가 되었고 그렇게 돼야만 한 시대에 이르렀다. 그녀의 원통함을 알아줄 이는 모두 사라지고 남은 것이란 지금 우리에게 경각심과 복잡한 감정을 남길 뿐이다. 유열부가는 이런 가사로 끝난다. “유열부여 이러한 열부사기 단필로 기록해둬서 간략한 이야기를 속세에 부치노라” 이렇게 끝맺음 난 유열부가는 여자 후손들에게 물려져 지금까지 전해졌다. 열녀의 일화가 이제 더는 미화되지 않겠지만 우리는 조선 후기 왜곡된 성리학적 질서의 희생양 혹은 그 질서에 순응한 이들을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이 전설이 기록된 땅 위에 살아가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그림 1 유열부가의 첫 부분 그림 2 유열부가가 기록된 두루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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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식당, 변화의 첫걸음
학생 식당, 변화의 첫걸음 202210058@sangmyung.kr수습기자 이소명 인간 생활의 세 가지 기본 요소는 바로 ‘의식주’이다. 그중 식은 食[밥 식]이라는 의미가 있다. 전 세계 모든 인구에게 밥은 매우 중요한 사항이겠지만, 한국에서는 밥에 대한 애정도가 특히 높다. 이를 증명해주는 말이 바로 “한국인은 밥심이지.”이다. 그렇다면 상명대학교 내에서 이처럼 중요한 밥을 책임져 주는 곳은 어디일까? 여러 식당가도 존재하지만, 대학교이니만큼 그 중 핵심을 차지하는 것은 단언컨대 학생 식당이다. 상명대학교의 학생 식당의 공식 명칭은 ‘정오아카데미’로 미래백년관 5층에 있으며 운영시간은 11:00~13:30이다. 이용자들은 학생 식당에 들어온 후 키오스크를 통해 6,000원으로 책정된 자율 한식과 주로 4,000~5,000원으로 책정된 푸드코트 중 선택하여 결제한다. 그 후 선택한 메뉴에 따라 식권을 들고 줄을 서야 한다. 푸드코트는 식권을 제시한 후, 국을 받아 급식판에 3~4가지의 반찬과 밥을 자율적으로 담는다. 오늘의 메뉴 또한 식권을 제시한 후, 주로 덮밥이나 우동 등 한 그릇에 나오는 음식과 기본 반찬을 배급받는다. 자신의 점심을 들고 마음에 드는 자리에 자유롭게 앉아 맛있게 식사를 한 뒤, 잔반을 버리고 급식판과 식기를 반납하는 것이 우리가 볼 수 있는 미래백년관 학생식당의 모습이다. [2022년 6월 정오아카데미 자율 한식과 푸드코트 메뉴] *상명대학교 공식 홈(https://www.smu.ac.kr/ko/index.do) 학생지원>식당 메뉴 캡처 화면 자율한식(11:00~13:30) 6,000원 푸드코트(11:00~13:30) 4,000~5,000원 표 1 정오아카데미 자율한식, 푸드코트 가격 식사를 마친 후 이동하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 보면 이용자들의 오늘 메뉴에 대한 평가를 들을 수 있다. “그래도 먹을만하더라.”, “오늘은 별로였어.” “나쁘지 않던데?” “그냥 다른 데 갈 걸 그랬나.” 다양한 평가가 오가지만 긍정적인 평가보단 부정적인 평가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미래백년관 학생 식당에 대한 평가 중 공통으로 가장 많이 주장된 것은 바로 ‘가성비가 좋지 않다는 것’이다. 가성비는 ‘가격 대비 성능의 비율’을 줄여 이르는 말이다. “메뉴만 보면 맛있어 보이지만 실제 음식의 맛은 부족한 느낌을 너무 많이 받습니다.” 상명대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익명 설문조사를 통해 얻은 의견이다. 학생 식당 맛 평가에 대해 [아주 맛없다, 약간 맛없다, 보통이다, 약간 맛있다, 아주 맛있다]로 선택지를 나누어 질문한 결과, ‘약간 맛없다’가 설문조사 참여 인원 150명 중 60명인 40%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하지만 메뉴 구성 평가에선 ‘보통이다’가 150명 중 66명인 44%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많은 소비자가 음식을 받고 겉모습만 봤을 때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입에 음식을 넣고 나서는 생각이 바뀐다는 것이다. “학생 식당이라면 보통 가격이 싸다는 메리트가 있기 마련인데, 우리 학교는 예외인 것 같아요.” 앞서 제시한 것처럼 자율 한식은 6,000원, 푸드코트는 4,000~5,000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학생 식당을 제외한 학교 근처 식당가들 역시 4~6,000원이면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다. 사기업인 식당가들과 학교 내에 소속되어 운영하는 학생 식당이 가격 측면에서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설문조사를 통해 다음으로 많이 주장된 것은 바로 ‘운영시간이 짧다는 것’이다. 정오아카데미의 운영시간은 11:00~13:30이다. 운영시간에 대해 [짧다, 적절하다, 길다]라는 질문지로 설문조사를 해 본 결과, ‘적절하다.’가 150명 중 81명인 54%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고, ‘짧다.’가 150명 중 69명으로 46%를 차지했다. ‘길다.’라고 답변한 사람은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점심시간에 맞추어 2시간 30분가량을 운영하고 있지만 소비자들은 13시나 14시에 수업이 끝나면 학생 식당에 가기가 애매해진다고 말한다. 근교에 위치한 학교들과 비교해 봤을 때 국민대와 세종대는 중식 운영시간이 14시까지이고 추가로 석식도 운영하고 있다. 주변 학교와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운영시간이 짧고, 실재적으로 느껴지는 불편함 때문에 위와 같은 주장이 끊이질 않는다. 제시된 두 가지가 소비자의 가장 큰 불만 사항이다. 과연 정오아카데미는 이러한 소비자의 불만 사항을 인식하고 있을까? 인식하고 있다면 그들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궁금증을 해결해 보고자 정오아카데미 소속 영양사님과 인터뷰를 나누어 보았다. Q: 타학교와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정오아카데미의 가격이 높은 편에 속한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식단은 알차게 구성되었지만, 음식의 맛이나 퀄리티가 가격 대비 떨어진다는 것이었는데요. 그래서 가격을 낮추거나, 조금 더 맛있어졌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다수 있었어요.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가격이 높게 책정된 이유가 있다면 그도 들어보고 싶습니다. A: 식단에 대해 좋게 평가해주신 점 감사합니다. 사실 맛에 대한 기준은 다양하고 여러 의견이 있어 모든 분을 만족시키는 것은 단체급식 특성상 몹시 어렵습니다만 만족도 높은 식사를 위해 항상 조리 실장님과 메뉴에 대해 충분히 상의하여 좀 더 맛있는 음식이 제공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자율 한식 같은 경우는 자율적으로 음식을 받아 가다 보니 개개인의 양 또한 고려하지 않을 수 없고 들어오는 식자재의 물가가 지속해서 상승하여 가격을 낮추는 것 또한 한계가 있습니다. 푸드코트의 경우 자율 한식과 다르게 양이 정해져서 제공되다 보니 상대적으로 가격을 낮게 책정하고 있으며 가격대가 낮은 메뉴의 다양성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가격은 식자재 비용은 물론 인건비, 전기, 가스, 수도, 임대료 등 모든 부분을 고려하여 책정되었습니다. 하지만 매년 증가하는 인건비와 수시로 증가하는 물가 상승률로 인해 현재 가격으로 운영하기에도 쉽지 않습니다. 또한 최근에도 서울 인근 대학에서 500~1,000원 정도의 가격 인상이 진행되고 있고 외부 일반 음식점들 또한 가격이 지속해서 인상되고 있기에 현재 저희 구내식당의 가격이 운영적인 면에서 높게 책정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메뉴의 다양성뿐만 아니라 다양한 가격대의 음식을 제공함으로써 선택의 폭을 넓히겠습니다. 영양사님의 말씀대로 최근 서울 인근 대학들은 하나둘 학생 식당의 가격을 높이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원래의 가격 그대로 5,000원 이하로 식당 가격이 책정하고 있는 학교들도 다수 존재한다. 앞서 제시된 비교 대상인 국민대와 세종대의 가격은 여전히 5,000원 이하를 유지하고 있다. 더불어, 최근에 논란되고 있는 물가 상승 이슈 이전부터 정오아카데미의 자율 한식 가격은 6,000원이었다. Q: 코로나 이전에는 중식 외에 석식도 운영했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현재에는 중식만 운영하고 있어 운영시간이 늘어났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존재했는데요. 혹시 운영시간 변경 계획이 있나요? A: 코로나가 완화되었다고 하지만 코로나 이전만큼 학생 식당이 활성화되지 않고 있습니다. 현재 중식 운영시간이 11시부터 13시 30분까지이지만 13시 이후에는 식수가 많지 않은 편입니다. 또한 주 52시간 적용 등으로 석식 운영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습니다. 운영 시간 변경에 대해서는 추후 상황을 지켜보면서 수요가 많을 경우 탄력적으로 변경할 계획입니다. 실제 학생 식당의 이용률을 지켜본 결과, 12시부터 12시 30분에는 사람이 몰리지만 13시 이후로는 확연하게 이용률이 줄어든다. 효율적인 운영을 고려한다면, 일찍 운영을 끝내는 것이 바람직할지도 모르겠다. 설문조사를 통해 소비자들은 가격 인하, 맛&질 개선, 운영시간 확대 등을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영양사님과 인터뷰를 통해 위 사실을 정오아카데미 측에 전달하였다. 영양사님은 하루하루 변동하는 식수를 예측하기 어려워 음식이 남거나 부족하면 속상하지만, 소비자들이 식사를 맛있게 하며 밝게 인사해주거나 “맛있다.”라는 말을 해줄 때 뿌듯함을 느끼고 하루를 더 보람차게 보낼 수 있다고 하신다. 더불어, 소비자가 먹을 수 있는 양의 음식만 담아가 잔반을 최소화한다면 이에 따라 절감된 비용으로 더 양질의 식사를 제공할 수 있다며 이 내용이 꼭 전달되길 바라셨다. 시기가 시기인 만큼 학생 식당의 즉각적인 큰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이나, 가장 부담감 없어 보이는 운영 시간 30분가량 늘리기 등과 같은 작은 변화를 기다리는 것이 현재로서는 최선의 방법인 것 같다. 양측의 의견이 전달되었으니 소비자와 생산자 양측이 서로를 이해하는 눈이 한층 더 따뜻해졌을 것이라 믿는다. 해당 글이 다수가 만족하는 학생 식당을 향해 가는 첫걸음이 되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참고문헌> 상명대학교 공식 홈페이지(2022), 대학생활 > 학생지원 > 식당 메뉴 > 서울캠퍼스, 2022.06.20., <https://www.smu.ac.kr/ko/life/restaurantView.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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