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메뉴
닫기
검색
 

FEATURE

제 7 호 자신만의 작은 숲이 있나요?

  • 작성일 2024-09-30
  • 좋아요 Like 1
  • 조회수 5889
이소명

자신만의 작은 숲이 있나요?

이소명 편집장

 

  가끔 무기력에 나의 일상이 먹혀버릴 때가 있다. 우리는 한 번쯤 우울함에 지배당하는 그런 시기를 겪는다. 우울함을 극복하는 방법은 각기 다르겠지만, 나는 한없이 게을러진다. 평소에도 잠이 많은 편이지만, 우울할 때는 24시간 중 14시간 이상은 자는 것 같다. 좋은 극복 방법이 아니란 것은 내 머리도 내 몸도 알고 있다. 하지만 우울함을 내 머리에 자리 잡게 한 근본적인 원인을 애써 외면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고 스스로 결론 내렸다. 운동을 한다던가, 공부를 한다던가 생산적인 활동을 하면서 우울함을 외면할 수도 있겠지만 그럴 힘조차 없을 때가 있기 마련이다. 

  하루는 오이가 잔뜩 들어간 비빔국수가 먹고 싶었다. 나는 날이 더워지면 밥에는 손이 잘 안 가는 것 같다. 면이나 빵 같이 비교적 가벼운 음식이 더 생각난다. 요리엔 솜씨가 없어 얼추 비빔국수 맛이 나는 비빔면을 시원하게 끓인 뒤 오이를 잔뜩 올려 먹었다. 그러다 보니 몇 번이고 되돌려본 영화 ‘리틀 포레스트’가 떠올랐다. 비빔면이 얼추 비빔국수의 맛을 따라갈 수 있듯이, 나도 리틀 포레스트의 주인공 혜원의 결론을 얼추 따라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나만 돌아왔다. 아무것도 찾지 못한 채

  혜원은 임용고시를 준비하지만 계속해서 시험에 낙방하게 된다. 하지만 ‘좋은’ 사람은 아니었던 혜원의 남자친구는 임용고시에 합격해 버렸다. 게다가 변변치 못한 음식으로 매일 끼니를 때우던 혜원은 자신의 삶에 지쳐버린다. 그렇게 무작정 혜원의 고향으로 향하게 된다. 집에 도착한 혜원은 아무도 없는 고향 집에 얼어붙어 있던 배추를 뽑았다. 그리고 집 안에 남아있던 한 줌의 쌀과 양념으로 배춧국과 쌀밥을 만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시골길을 혼자 내려가, 아무도 없는 집에서 식사를 했지만 혜원은 안정을 느끼게 된다. 

  여태까지 나의 작은 숲은 ‘잠’이라고 착각했던 것 같다. 작은 숲이란, 여유와 안정을 찾도록 도와주는 곳이다. 그렇게 무언가를 다시 시작할 힘을 충전하는 곳이 아닐까. 그러니깐 잠은 작은 숲에 속할 수 없다. 잠깐 쉬어가며 나를 재충전하는 곳은 작은 숲이 될 수 있지만, 잠은 날 갉아먹을 뿐이다. 

 

겨울을 겪어 낸 양파는 봄에 심은 양파보다 몇 배나 달고 단단하다. 

  나의 잠처럼 혜원도 현실을 외면한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자 모를 심고, 여름에는 참외를 수확해 먹는다. 또 가을에는 밤을 줍는다. 이런 고향살이에는 혜원의 친구인 재하와 은숙이 함께 한다. 다 같이 자연을 가꾸고, 자연을 통해 얻은 작물로 음식을 만들어 먹는 일상을 보낸다. 하지만 재하와 은숙은 혜원이 현실을 외면한 채 고향으로 도피해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느 날 재하는 혜원의 정곡을 찌르는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그렇게 바쁘게 산다고 문제가 해결돼?” 임용을 준비하던 혜원은 더 이상 시험을 준비하지 않고 자연을 가꿀 뿐이었다. 그렇다고 시험을 마음속에서 완전히 떨쳐 내지도 못했다. 또, 혜원은 ‘좋은’ 사람은 아니었던 남자친구에게 명확한 이별을 고하지 못했다. 간간히 짧은 연락을 하며, 애매한 연인 관계를 아슬아슬하게 이어 나가고 있을 뿐이었다. 자연을 가꾸는 데만 몰두한 채 자신의 꿈과 사랑은 애매하게 외면하고 있었다. 혜원은 재하의 날카로운 질문을 듣고 나서야, 고향에 내려온 지 1년이 다 되어가서야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하지만 혜원은 자연과 함께 한 1년을 통해 삶의 방향성을 찾을 수 있었다. 겨울에 고향으로 내려왔던 혜원은 다시 겨울이 찾아오고 깊어질 때쯤 서울로 올라간다. 서울로 올라가 무얼 하는지는 명확히 나오지 않지만, 아마 쉽사리 정리하지 못했던 일들을 훌훌 털어버린 것 같다. 그리고 봄이 되자 혜원은 다시 고향으로 내려온다. 그 1년이 있었기에 서울에서의 일들을 정리할 용기가 생기고, 새로운 목표를 세울 수 있었던 혜원이다. 

 

다른 사람이 결정하는 삶을 살고 싶지 않아서

  처음 이 영화를 보고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어느새 리틀 포레스트는 힘들 때마다 생각나는 영화가 되었다. 나와 어느 정도 비슷한 처지인 혜원이 건강한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바라볼 뿐인데 왠지 모르게 위안이 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때마다 나만의 숲을 찾지는 못했던 것 같다. 온전히 나만을 위한 공간, 완전히 나를 내려놓을 수 있는 공간이 마땅히 없다고 생각했다. 그저 시간이 약이라 생각하며 힘든 감정을 떨쳐냈다. 그런데 나의 생각을 바꿔준 누군가의 한마디가 있었다. 


“우리 모두는 집이 있어야 해요. 힘들 때 돌아갈 수 있는 그런 집 말이죠.”


이 말을 듣고선 리틀 포레스트의 작은 숲이 생각났다. 그러고는 난 여전히 작은 숲도 나의 집도 찾지 못했다는 사실이 조금 암울했다. 


“저의 집은 자우림이죠. 그리고 뭐 여러 개가 있겠죠. 여러분의 집은 무엇인가요?

아직 집을 찾지 못했다면 여러분 스스로가, 나 자신의 집이 되어주면 되죠”


  그제야 아차 싶었다. 날 다스리고 지킬 수 있는 건 결국 자신밖에 없다는 사실을 놓치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듣고, 나를 위해 하는 이런 일상적인 선택들의 소중함을 너무 늦게 알게 된 듯하다.

  앞서 말했듯 나는 아직 작은 숲을 찾지 못했다. 그렇지만 혜원도 나도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이미 작은 숲을 1개씩은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 자신이 가장 따스한 작은 숲이며, 가장 안정적인 집이라는 사실을 놓치고 살아왔던 것일지도 모른다. 

 

나도 나만의 작은 숲을 찾아야겠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속에서 가장 끌렸던 인물이 있다. 놀랍게도 혜원이 아니라, 혜원의 엄마이다. 혜원이 어렸을 때 몸이 안 좋았던 아빠의 요양 생활을 위해 혜원의 가족은 시골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혜원의 아빠가 세상을 떠나고, 혜원과 엄마는 단둘이 시골 생활을 이어 나간다. 이제 겨우 초등학생이 된 혜원에게 엄마는 매일 요리를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자연의 이치, 타이밍의 중요성도 함께 전해주었다. 혜원이 수능을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혜원의 엄마는 편지를 남겨둔 채 집을 떠났다. 편지 속에는 온전히 자신을 위한 삶을 찾기 위해 그동안 해보고 싶었던 일들을 하러 떠난다고 적혀 있었다. 혜원은 성인이 되어 서울로 상경하고, 대학을 졸업한 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다, 다시 고향으로 내려올 때까지 엄마를 원망했다. 오히려 이런 엄마를 단번에 이해하고 존중하는 자식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1년간의 고향살이를 엄마가 남겨준 요리 레시피들과 함께하며 성장한 혜원은 엄마를 이해하게 되었다. 엄마는 혜원이 뭐든 혼자 버텨낼 힘을 길러준 것이다. 일찍 남편을 떠나보내고 홀로 시골에서 어린 딸을 키워낸 혜원의 엄마는 힘든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 세월에는 혜원의 ‘엄마’만 있을 뿐 ‘자신’은 없었을 것이다. 

 

  이 글을 마무리 짓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리틀 포레스트에 대해 쓰면서 작은 숲을 찾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던 밴드 자우림의 보컬 김윤아의 콘서트에 갔다가 우연치 않게 또, 너무 오래 고민했던 시간이 무색하게도 그녀의 한마디에 답변을 찾았다. 내가 결론 내린 작은 숲은 나 자신이며, 내가 원하는 삶이다.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 위로가 되고, 또 힘이 되고, 무기력을 이겨내는 방법이 되어줄 것이다. 어쩌면 나는 이 답변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혜원의 엄마가 가장 끌렸던 것 같다. 

영화의 마지막은 “나도 나만의 작은 숲을 찾아야겠다.”는 혜원의 대사로 끝난다. 힘들 때마다 이 영화를 찾게 되는 건 마지막에 나오는 혜원의 이 대사가 듣고 싶기 때문인 것 같다. 내가 또 언제 다시 무기력에 먹혀버릴지 모른다. 그때마다 이 영화가 나 스스로를 다시 생각하게 해주고, 다시 일어나게 도와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