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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TURE

제 7 호 X

  • 작성일 2024-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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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5616
송지민

X

송지민 정기자

 

# D-276

늦은 저녁을 먹고 산책하면서, 너와 나는 서로의 집 앞 벚꽃이 더 예쁘다는 말장난 끝에 내년을 약속하고서는 우리가 되었지. 나도 산책을 꽤나 좋아하지만 너는 따라갈 수가 없더라. 어떻게 아무리 걸어도 조금도 힘들어하는 기색이 없을 수가 있지? 그래도 내가 지쳐 하는 것 같을 때면 금세 알아차리고 벤치를 찾는 네 눈빛이 마음에 들었던 것 같아. 잠깐만 쉬고 있으라며 뛰어가서는 내가 좋아하는 음료수를 사 오는 것도. 이후로도 꽤 많은 산책을 했는데, 별다른 목적 없이 만나서 함께 걷는 그 시간이 좋았어. 걷는 동안 같은 시선으로 같은 것을 바라보며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도, 계속 달라지는 풍경에 얘기 나눌 소재가 끊이지 않는 것도, 모두 다.

 

# D-219

내가 맨날 하던 거 있지, ‘만약에~’ 이거, 기억나? 허무맹랑한 소리라며 그런 일은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는다고 제대로 대꾸도 안 해주는 다른 친구들과 달리, 내 만약에 게임에 진지하게 고민해 주고 최대한 구체적으로 대답해 주려 하는 모습이 조금 감동이었어. 사실 조금이 아니라 많이 고마웠어. 나중에야 알았거든. 내가 그런 상상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를 재밌어하는 것 같아서, 어떻게든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네가 머리를 쥐어짜 냈다는 걸. 그 시간이 나만 즐거웠던 게 아니면 좋겠다. 맞춰주려고 노력해 줘서 고마워, 너는 참 다정한 사람이야.

 

# D-185

연애는 서로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 것 같다고, 그래서 나는 너를 믿는다고, 우리 둘 다 같은 말을 했었지. 바빠서 오랜 시간 연락이 닿지 않아도, 이성이 끼어 있는 술자리에 나가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던 것 같아. 내가 선택한 사람이 나를 실망시키는 일은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랬나 봐. 같이 있는 동안에는 최대한 행복하게 보낼 방법을 고민하고, 떨어져 있는 동안에는 상대방의 개인적인 시간을 진심으로 존중해주는 네 모습이 나와 닮은 것 같아서 좋았어. 그런 점에서 우린 참 잘 맞았던 것 같아.

 

근데 어디서부터 잘못됐던 걸까.

 

# D-131

나는 너의 가치관이 궁금해서, 네가 어떤 사상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생각들이 궁금해서, 그냥 그래서 사회적으로 예민할 수도 있는 점들을 너와 함께 얘기해 보고 싶었어. 처음에는 싸울 것 같다며 피하기만 하던 네가 어느새 나와 같이 토론해 주는 것같이 느껴져서 그게 되게 고마웠어. 근데 나는 너를 설득하려 얘기를 꺼낸 게 아니라 단지 우리가 서로 다른 부분을 이해하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너는 아니었나 봐. 너는 우리가 같아지길 바랐나 봐. 하나의 핀트에 꽂히면 내가 네 의견에 동의할 때까지 이어 나가던 몇 시간의 통화가 나는 점점 지쳐갔어. 우리 누가 옳고 그른 지 따지려 시작한 이야기가 아니었잖아. 그런데 항상 마지막엔 그렇게 흘러가는 것 같아서 나는 그게 많이 아쉬웠어. 너는 끝까지 나를 설득하려 했고, 나는 끝까지 그런 너에게 넘어가고 싶지 않았고.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 둘 다 참 미련하다, 그치.

 

# D-74

“여기 와봤어? 이거 먹어봤어?” 처음이건 아니건 뭐가 중요하길래 그렇게 집요하게 물어보는지 몰랐어. “첫눈 오는 날, 무슨 일이 있어도 만나야 해!” 우린 각자의 일정으로 만나지 못했고,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기분이 상한 걸 온몸으로 티 내는 네 모습을 이해하지 못했어. 나의 첫사랑이 네가 맞는지 물어볼 때, 네 말의 의도를 뻔히 알고 있음에도 사랑에 숫자를 매기며 처음에 집착하는 너의 그런 부분이 우습고 싫어서 끝까지 네가 원하는 대답을 하지 않았어. 그냥 지금 이 순간에 우리가 같이 있다는 게 중요한 거 아닐까. 현재에 진심을 다해 충실하면 됐지 굳이 과거를 끌어와 더 나은 현재를 만들려는 네가 이해되지 않았어.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네가 ‘처음’에 집착했던 이유는… 그 단어에 설렘과 두려움 등 여러 감정이 담겨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 모든 걸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어.

 

싸우는 날들이 늘어갈수록 마음이 차분해지기 시작했어.

 

# D-0

나는 우리가 비슷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근데 그냥 내가 원하는 연애를 하기 위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네가 맞춰주고 있었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았어. 나는 바라지도 않았는데 말이야. 그리고 나는 원래의 네 모습이 보일 때마다 이해되지 않으면서도 싸우기 싫어서 그냥 덮어두고는 넘어갔지. 너도 그걸 바라진 않았을 텐데 말이야. 우리 서로 진작부터 솔직했다면 지금과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잠시 생각해 봤는데… 아니, 우리는 똑같았을 거야. 그냥 너랑 그만하고 싶으니까 그렇게 생각할래. 나는 더 이상 너에게 화가 안 나. 이해되지 않는 것도 없어. 네가 하는 모든 생각과 행동들, 다 그럴 수 있지. 응, 나는 이제 그냥 0이 된 거야.

 

# D+45

너와 헤어지고 나서 별생각 없이 바쁘게 살다 보니 정리하는 걸 까먹고 있었어. 그래서 생각난 김에 한 번에 다 하려 했는데, 내가 사진 찍는 걸 싫어했던 터라 정리할 것도 없더라. 미안해, 그렇게 같이 사진 찍고 싶어 했는데 그거 한 번을 못 해줘서. 네가 앞으로 만날 사람은 꽤 다정하고, 세심하고, 귀엽게 애교도 부릴 줄 아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사랑스러운 말과 함께 영원을 약속하고, 말하지 않아도 너의 감정을 깊게 들여다보며 공감해 주고, 네가 원하는 방식으로 기분을 풀어줄 수 있는 그런 사람. 네가 내게 바랐지만 나는 될 수 없었던.

 

# D+127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너와 헤어지고 혼자 지내는  너무 편했던 날들이 무색하게도 어느새 그런 사람이 생겼어. “보고 싶어지금 갈게.” 아니라 “보고 싶은데 언제 시간 괜찮아?”라며 나에게 여유를 주는내가 원하는 배려를 해주는 사람을 만났어 사람은 정말로 나와 비슷한 사람인  같아무던해 보이는 성격도자기 감정에 대해 솔직한 것도터무니없는 상상과 농담을 즐겨하는 것도같이 있을  서로 아무 말이 없어도 너무 편안하고 좋아그래서 너와 했던 연애를 경험 삼아  사람이랑  나은 연애를 하고 싶어그러니까 너도 이제 그만 프로필 사진이랑 상태 메시지 지우고좋은 사람 찾을  있길 바랄게정말로  지내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