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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제 674 호 5월의 뜨거운 함성, 학보는 침묵하지 않았다

  • 작성일 2019-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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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4063
이해람

1970, 80년대 독재정권 치하에서 기성언론이 제 역할을 해내지 못했다. 따라서 대학신문은 민주화의 최전선에 서있던 대학가 목소리를 다루면서 ‘대안언론’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해냈다.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 커다란 자취를 남긴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논의할 수 있었던 곳은 한때 ‘지성인의 아고라’였던 대학이었고, 각 대학 언론은 이러한 논의를 충실히 보도했다. 1980년 5월 40주년을 앞두고 있으면서 대학의 성격이 바뀐 지금, 80년대의 대학과 대학언론의 모습을 되돌아보고 2020년의 5월을 고민하는 것은 이 시대 대학의 커다란 고민으로 보인다.


“학원민주화” 열풍, 1980년 대학의 봄은 ‘핫플’보다 뜨거웠다


12월 12일 전두환을 주축으로 한 신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자 전국의 대학교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일어났다. 개강을 맞이한 3월부터 신군부를 규탄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집회가 끊이질 않았고, 4,19혁명 20주년을 앞두고 학원민주화 열풍이 불어 ‘어용 교수 퇴진’ 학원민주화를 거부하는 ‘총학장 퇴진’운동이 전개되었다.이 당시 학원민주화 집회를 진행한 학교는 문교부의 집계에 따르면 총학장 퇴진 요구 21개 교, 어용 교수 퇴진 요구 24개교, 재단비리 척결 요구 12개교, 학생회 인정 및 학내 언론자유 요구 20개교에 달했다.5월 2일 비상계엄해제와 정부주도개헌에 반대하는 서울대학교 비상학생총회에 1만 2천명이 모여들었다. 이를 기점으로 대학가는 신군부를 반대하는 정치투쟁의 현장이 되었고 학생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상명대학의 진정한 발전을 위해 대의에 의해 건의”


상명여자사범대학 상명사대학보를 통해서 우리 대학 또한 학원민주화 바람이 불었다는 것을 찾을 수 있었다. 상명사대학보 1980년 4월 1일 제140호 보도에 따르면 당시 총학생회가 학장에게 건의문을 제출했다.건의문은 “상명대학의 진정한 발전을 위하여 전 상명인의 대의에 의해 건의합니다. 이러한 건의는 단순한 시세의 흐름에 따른 것이 아닌 오직 상명인의 내적 필연성과 진실에의 갈망에 의한 것임을 명백히 밝힙니다”라며 “경영진과 교수진을 분리할 것, 부족한 교수진을 확보할 것, 무능교수 및 어용교수의 존재를 과감히 물리칠 것, 대학은 가족의 기업이 아니며 대학 지도자를 신뢰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 것, 유능한 교수를 공개 채용할 것” 등을 건의했다.건의문이 학교에 접수되자 교수단은 긴급회의를 열어 학생들의 요구가 학교당국에 받아들여지도록 촉구하면서 교수 자체 내의 반성과 교권확립을 위해 뭉칠 것을 결의했다. 학교당국은 총학생회의 건의를 받아들이겠다며 실안을 발표했다. 실안은 건의를 최대한 받아들일 수 있는 인사단행과 교수 공개채용, 교수진 확보 등을 포함하고 있다. 이에 대해 상명사대학보는 “상명의 지성은 침착했었다”며 “대화를 통한 갈등의 극복을 성공리에 마친 모범적 사례”라고 평가했다.


5월 대학가를 중심으로 민주화 투쟁이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우리 대학 축제인 ‘자하 축제’가 무기한 연기되기도 했다. 총학생회에서 “학내외적 모순이 심화되어 가고 있는 시점에 해결 방향 설정 없이 축제 분위기에 젖을 수 없다. 올바른 학원, 사회 민주화를 위해 노력하겠다”며 축제를 무기한 연기하고 시국에 관한 공청회 및 토론회를 가졌다.


5.17 계엄령 전국 확대, 대학은 강제 휴교, 학보는 폐간


서울역에서 10만 명의 대학생이 회군한지 2일이 지난 5월 17일 신군부는 시국을 수습한다는 명목으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정치활동 금지, 국회 폐쇄와 함께 시위를 주도한 학생들을 구금했다.그 후 전국 대학에 휴교조치가 내려져 대학생들이 대학교에 나갈 수 없는 일이 벌어졌고, 5월 18일 전남대에서 전남대 학생들과 공수부대의 충돌 발생 후 5.18 민주화운동이 전개되었다.상명사대학보는 5월 15일 발행된 제141호 이후 9월 15일까지 신문이 발간되지 않았다. 9월 15일에 발행된 제142호에서 “5월 17일 휴교조치 이후 109일 만인 9월 3일 대학이 문을 열었다”고 보도했다.학보는 매년 4월 4.19혁명을 “혁명의 민족, 민주, 민중지향적 가치는 우리가 실현해야할 오늘의 과제”라고 평가하였지만 5.18에 대한 보도는 찾아볼 수 없었다.이후 처음으로 보도된 기사는 1987년 5월 15일자에서 발견되었다. “5.18이후 대두된 반미의식”에서 “영원히 치유될 수 없는 상처가 되어 버린 광주사태를 미국이 용인함으로써 한국인의 대미인식에 결정적 변화가 오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또한 “광주는 살아있다” 특집기사를 통해 앞서 언급된 ‘광주사태’를 ‘광주항쟁으로’ 정의하면서 지역문화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단체들을 찾아 취재, 보도했다.


‘5.18의 진실’ 알린 ‘5공 청문회’ 보도는 어떻게


1987년 6.29 선언 이후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되었지만 신군부 독재의 잔재인 노태우가 당선되면서 5.18에 대한 진상규명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그러나 1988년 총선에서 여당인 민주정의당이 125석을 차지해 여소야대 정국이 펼쳐졌다. 따라서 5공화국 비리를 조사하는 ‘5공비리 특별조사위원회’가 설치되고 청문회가 진행되면서 5.18항쟁의 참상이 매스컴을 통해 전국민에게 알려지게 되었다.전두환이 청문회에 참석하기 전인 1988년 12월 1일 상명대학보는 “5공비리의 주역인 전비리, 이큰손 소환청문회”라는 가상청문회 특집을 지면에 실었다. 여기서 청문회를 진행하는 가상의 정당인 ‘혁신당’은 5.18 광주 참상을 “권력을 장악하려는 군부세력의 의도적인 과잉진압’이며 “민주사회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지적했고, “광주의 진실을 취재, 보도하지 못하게 했다”며 신군부의 언론장악과 5공의 비리를 낱낱이 밝혔다.1988년 이후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진상조사가 이루어지고 1995년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어 대중적인 관심을 받게 되면서 상명대학보에서도 여러 차례 특집으로 다룬 바가 있다.


1980년 서울은 봄, 2019년 대학의 계절은?


박정희가 사망한 1979년 10월 26일부터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가 단행된 1980년 5월 17일까지를 흔히 ‘서울의 봄’이라고 부른다.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전국에 울렸던 시기이기 때문이다.그렇다면 2019년 현재, 대학가의 계절은 어디에 해당할까. 2016년 통계청 ‘가계동향’이 발표되면서 언론은 현 20대를 “유사 이래 최초로 부모보다 가난한 세대”라고 표현했다. 현재 20대 대학생들이 학원, 사회문제보다 취업에 목매고 보수화되는 것은 ‘필연적 사회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비상식적인 사회구조에 순응하고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어쩔 수 없다’며 합리화하는 것은 5.18이 주는 교훈이 아니다. ‘586세대’가 되어버린 ‘386세대’가 가진 80년대의 논조를 지금까지 끌고 갈 수는 없지만, 2019에 알맞은 ‘대학의 봄’에 대해 고민할 주체는 어디까지나 대학생이다. 5.18 40주년을 앞두고 ‘대학의 계절’을 대학생 스스로 고민해보는 것은 어떨까


이해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