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76 호 자율주행자동차의 미래와 국내 도입의 가능성
자율주행자동차의 미래와 국내 도입의 가능성 윤리적 딜레마의 해결과 법적정비 시급 한국의 자율주행자동차 2018년 2월, 글로벌 컨설팅 업체인 KPMG가 한국, 미국 등 20개의 국가를 대상으로‘자율주행자동차’개발 수준을 평가한 지표를 발표해 눈길은 끈 바 있다. KPMG는 제도와 정책, 기술혁신, 기반시설, 소비자 수용도라는 4가지 측면에서 평가하는데, 우리나라는 기반시설 분야에서 4위, 정책 분야 14위, 기술혁신 분야 9위를 기록해 종합 순위 10위를 기록했다. 가장 취약한 분야로 정책 분야가 지적된 이 시점에서 자율주행 자동차를상용화시킨다는 일이 실현 가능할까? 트롤리 딜레마와 우리의 현실 자율주행자동차 뉴스를 한 번이라도 관심 있게 찾아본 사람이라면, “승객을 태운 자율주행 차량 앞에 갑자기 뛰어드는 무단 횡단 보행자가 나타난다면, 자율주행 차량은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까?”라는 트롤리 딜레마(Trolley dilemma)를 알고 있을 것이다. 트롤리 딜레마란, 사람들에게 브레이크가 고장난 화물차를 제시하고 다수를 구하기 위해 소수를 희생할 수 있는지를 판단하게 하는 윤리적인 문제 상황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렇게 자율주행차량이 직면한 윤리적 딜레마는 법적으로도 사회적 인식면에서도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실제 2016년 5월, 테슬라의 자율주행 소프트웨어에 의해 추돌사고가 일어났고, 이로 인한 인명 피해가 있었다. 이는 우리 사회가 이런 기술에 대해 준비가 미흡함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인공지능의 발달과 자율주행 AI(인공지능)는 현재 실용화되는 과정에 있고 지금도 발전하고 있지만, 누구나 한 번쯤“인공지능에게 우리 인간이 역으로 지배당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봤을 정도로 기술의 진보에 대해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I,ROBOT’,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등 인공지능의 발전으로 인해 인간에게 피해 끼침을 다룬 영화가 다수 존재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두려움 때문에 현재AI의 개발이 중지된 것은 아니다. 이러한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기술의 진보를 기대하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편의성’이다. 미국 도로교통안전국은 자동화 수준을‘▲기능중심자동수준 ▲조합기능 자동수준 ▲제한자율주행수준 ▲완전자율주행수준’으로 차례로 4단계에 걸쳐 나눠진다. 흔히 생각하는 자율주행자동차의 수준은 3~4단계로 보고 있으며, 현재 시중에 판매되는 차량은 1~2단계의 차량만이 판매되고 있어 사실상 과거 테슬라나 우버 같은 사고가 나타날 일은 사실상 없다고 전문가들은 판단하고 있다. 또한 인공지능은 크게‘약한 인공지능(weak AI)’과‘강한 인공지능(human level machine intelligence)’으로 나뉜다. 우리가 흔히 공상 영화나 상상을 통해 두려워하는 인공지능 이야기는 아마 강한 인공지능에 대한 것일 것이다. ‘강한 인공지능’은“어떤 문제를 실제로 사고하고 해결할 수 있는 컴퓨터 기반의 인공지능. 지각력과 스스로를 인식하는 능력이 있다. 인간의 사고와 같이 컴퓨터 프로그램이 행동하고 사고하는 인간형 인공지능”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갖고있다. 단순히 인간과 다를 바 없이 행동하는 인간형 로봇이나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기계가 인간의 지적 수준을 뛰어넘어 인간과 강한 인공지능이 공존할 가능성은 적다고 주장하는 의견이 있는 한편, 그 강한 인공지능에 의해 인류에게 영생을 가져다줄 가능성도 배척할 수는 없다는 반론도 적지 않다. 그렇다면‘약한 인공지능’은 아무런 의구심 없이 사용해도 되는가? 물론 아니다. ‘약한 인공지능’은 일정 범위에서 인간의 수준을 초월하고 고성능화되더라도, 정해진‘틀’내에서만 활동이 제약된다. 따라서‘강한 인공지능’이 가져올 것이라 생각하는 두려움에 비해 실질적인 위험성이 적지만 약한 인공지능 역시 단순노동 업종(1차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위협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미 우리 사회는‘약한 인공지능’기술이 삽입된 기계를 가정 내에서 많이 사용하고 있다. ‘로봇청소기’가 그의 대표적인 사례인데, 이는 2001년 11월 스웨덴에서 첫 출시했을 만큼 이미 ‘편리성’은 입증된 것과 다름이 없다. 자율주행자동차의 핵심 기술은‘인공지능’이다. 즉 인공지능의 발달함에 따라 자율주행의 전망도 밝을 것으로 예상된다. 기술의 진보를 받아들이는 올바른 태도 실제 자율주행자동차를 반대하는 사람들만큼이나 지지하는 사람도 많다. 양측은 교통사고 감소, 교통정체 완화 등 긍정적인 변화에 중점을 두어 토론을 한창 벌이고 있다. 자동차 관련 국제 기준을 제정하는 WP29(UN 산하 자동차실무위원회)에서 높은 수준의 자동화를 이뤄내기 위해 자율주행자동차에 쓰이는 기능, 사이버 보안 등으로 상용화에 밑거름이 될 법률안을 제정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경우, 국토교통부에서 자율주행자동차의 임시운행 허가 시 자동차 손해배상 법에 따른 보험가입을 의무화했다. 또한 국토교통부는 만약 사고 발생 시 보험으로 처리하고, 차량 내에서 결함이 밝혀지면 제작사 측에서 책임을 지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한다. 자율주행자동차 즉 인공지능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사실상 생활 속 모든 것이 컴퓨터의 통제로 돌아가는 21세기에서 이러한 시스템이 자칫 해킹되거나 고려하지 못한 변수로 인해 오작동이 난다면 아마 큰 사고로 이어질 것이다. 따라서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현재, 미래기술의 화려함에 단번에 매료되기보다는 그에 따른 위험성을 우선으로 생각해보고, 기술의 진보를 다시 한번 고려해보는 자세야말로 우리가 과학기술을 받아들이는 올바른 자세가 아닐까? 김경관 수습기자
제 676 호 동물권, 무시가 아닌 존중해야 할 권리
▲ 세계 실험동물의 날을 맞아 동물보호단체 회원들이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출처: 시선뉴스) 복제견 ‘메이’로 드러난 동물실험의 민낯 지난 4월 27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실험견 '메이'의 추모식이 열렸다. 비글종 복제견인 메이는 서울대학교 수의대 이병천 교수의 연구실에서 실험에 이용되다가 학대를 당해 숨진 의혹을 받고 있다. 이와 함께 복제견 메이의 앙상한 모습을 담은 영상이 퍼지면서 이병천 교수 연구팀의 동물학대 논란이 도마 위에 올랐다. 이에 따라 서울대는 지난 4월 18일 연구를 중단시키고 실험 과정에서 동물 학대 여부가 있었는지 조사하고 있지만 논란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현재까지도 이 교수 연구팀의 실험 중 폐사한 실험견이 더 있다는 동물보호단체의 추가 폭로가 이어지고 있다. 이런 이병천 교수 연구팀의 동물실험 논란은 우리 사회에서 묵인하던 동물 실험 문제를 수면위로 드러냈다. 실제 우리나라에서는 동물실험이 증가하는 추이를 보이고 있다. 농림축산부에 따르면 2013년부터 실험동물의 수가 증가해 재작년인 2017년에는 총 약 300만 마리 이상이 실험에 이용되었다. 특히 사역 동물을 실험에 이용하는 나라는 OECD 국가 중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이는 세계적으로 동물실험을 줄여나가는 추세를 역행하는 모습이다. 유럽연합의 경우, 2013년부터 화장품실험에 대한 동물실험을 전면적으로 금지시키기고 있다. 법으로 동물실험을 규제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동물을 보호하기 위한 ‘동물보호법이’과 ‘실험동물보호법’이 존재하지만 내용이 추상적이고 강제할 수 있는 규범이 없다는 점 등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이병천 박사의 동물실험의 경우에도 동물보호법의 허술한 안전망을 빗겨나간 사례에 해당한다. 해당 법에는 사역 동물의 실험을 금지하고 있지만 예외조항으로 교육기관을 두고 있어 서울대학교 소속의 이병천 박사 팀이 사역 동물을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할 수 있었다. 따라서 실질적인 동물 보호가 가능하도록 하는 동물보호법 개정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동물의 생명권을 보장해야하기 때문에 조금 더 엄격해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동물은 인간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물론 모든 동물실험이나 연구를 법으로 감시하고 제재할 수 없다. 그러나 동물이 말을 하지는 못하지만 고통을 느끼는 생명체라는 점을 인지하고 보다 신중해야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중요한 것이 연구자 및 실험관계자의 윤리성이다. 철학자 피터싱어는 동물의 권리보장을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로 인간의 행복만을 중요하게 취급하는 인간중심주의는 일종의 인종차별주의와 다르지 않으며, 동물도 인간과 같이 쾌고감수능력을 지니므로 그 권리를 보호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그의 이야기처럼 동물은 정당한 권리를 가지므로 동물실험을 직·간접적으로 행하는 사람들에 대한 윤리적 책임이 요구된다. 연구자에 대한 윤리교육이 필수적으로 이행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인간과 동물이 조화로운 공존을 이루어야할 때 이러한 동물실험에서의 동물학대 논란은 실험동물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다. 사회가 동물 생명이 아닌 기계적인 수단으로서 인식한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동물은 우리 환경의 일부라는 점에서 그리고 인간이 동물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인간에게 책임이 있다. 이를 반영한 개념으로 동물복지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One-health (하나의 건강), One-welfare(하나의 복지)가 있다. One-health는 인간, 환경, 동물의 건강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사람과 동물, 환경이 하나의 생태계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결코 개별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One-welfare란 인간과 동물의 복지가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라 것을 의미한다. 인간과 동물의 조화롭게 공존해야 한다는 점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과 동물의 하나의 복지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지속적인 관심과 행동이 요구된다. 주변 사람들과 동물보호에 대해 이야기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며 의사소통해야한다. 그 이야기들이 모여 토론과 협상으로 나아가고 결국 동물을 함부로 다루는 사람들에게까지 도달해 변화를 이끌어야 한다. 또한, 지금은 펫코노미(Pet+Economy)라는 신조어가 등장할 만큼 반려동물이 우리의 동반자로 자리매김한 시대이다. 반려동물이 가족구성원의 일부로서 소중한 존재인 것처럼 다른 동물들도 소중한 생명이라는 점을 인식해야할 때이다.
제 675 호 혐오시설 거부하는 님비, 공동체의식 강화 필요
▲ 강서구 주민들이 특수학교 설립 반대 시위를 하고 있다. (출처: 강서포스트뉴스) “집값 떨어져”, 특수학교 거부하는 님비현상 2015년도, 서울시 교육청이 강서구에서 특수학교 설립을 발표하자 해당 지역주민들은 ‘혐오시설’을 반대한다며 반발했다. 집값 하락, 안전 문제 등을 이유로 민원을 지속적으로 제기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역주민들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부산대교육연구소의 연구에 따르면 특수학교 설립은 그 지역의 집값에 영향을 주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장애인에 의한 범죄율은 일반인에 비해 2배 이상 낮다. 이처럼 특수학교는 장애인들에 대한 편견으로 인해 그동안 지역사회에서 ‘혐오시설’로 낙인찍혀왔다. 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들은 특수학교의 필요성을 호소했지만 반대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결국 특수학교 개교는 미뤄져 2019년 현재까지도 개교가 연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는 서울시 강서구의 사례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다. 특수학교에 이어 특수학급 설치도 제대로 이루어 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특수학급 설치는 법적으로 의무화되어있지만 지키지 않았는데, 처벌 조항이 없어 여러 학교에서 특수학급 설치를 거부하는 상황이다. 따라서 장애 학생들의 교육권은 사람들의 이기심에 의해 침해받고 있다. 실제 교육부에 따르면 2017년 전국에서 특수교육이 필요한 학생은 8만 명 이상이지만 장애학생 특수학교 진학률은 30%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동등한 인간으로서 가져야할 교육의 권리 더 나아가 행복추구권를 침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장애학생들은 근처에 특수학급, 학교가 없어 멀리까지 다녀야 하거나 아예 교육을 받지 못한다. 모든 학생들에게 사회를 살아가기 위해 교육은 침해할 수 없는 필수적인 권리이다. 장애학생들도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장애학생들의 인권은 고려하지 않은 채 동네 집값이라는 개인의 이익에만 몰두해 그 권리가 지켜지지 못하고 있다. 부족한 쓰레기 처리장 설치를 막는 이기주의 이처럼 개인의 이익만을 중시해 특수학교 설립을 거부하는 것은 님비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님비현상은 ‘Not in my background’의 준말로 즉 ‘내 뒷마당에서는 안 돼.’라는 뜻이다. 장애인 시설, 쓰레기 처리장 등 혐오시설이 자신이 사는 지역에 들어서는 것을 반대하는 현상이다. 공익을 위한 일이지만 자신이 속한 지역에는 이익이 되지 않으므로 반대하는 사람들의 이기적인 행동인 것이다. 이때 혐오시설은 지역 주민에게 공포감이나 고통을 주거나, 주변 지역의 쾌적성이 훼손됨으로써 집값이나 땅값이 내려가는 등 부정적인 외부효과를 유발하는 시설을 의미한다.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우리나라 쓰레기 산 문제는 대표적 혐오시설인 쓰레기 처리장이 원인 중 하나이다. 쓰레기 처리장은 쓰레기를 취급한다는 점에서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준다는 점과 환경 오염 논란을 이유로 혐오시설에 속한다. 지난 2월 경남 남해군은 폐기물 처리장을 공모하며 이에 대한 인센티브로 총 100억 원에 달하는 지원금을 제시했다. 또한, 남해군의 매립장 사용기간이 공식적으로 만료되어 시급한 상황이지만 신청 마을이 없다. 뿐만아니라 다른 지역들에서도 쓰레기 처리장은 님비현상으로 설치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쓰레기 매립장, 소각장 등 쓰레기 처리장은 지역의 쓰레기를 처리하기 위해 꼭 필요한 곳이다. 쓰레기 처리장이 없어 쓰레기를 처리하지 못하면 우리나라 곳곳이 쓰레기로 쌓이게 되고 이를 처리하기 위한 비용은 국민의 부담으로 이어진다. 실제 경기도 의성군에는 제때 처리하지 못한 쓰레기가 모여 방치되었고 결국 국비를 들여 그동안 쌓인 쓰레기를 처리하게 되었다. ▲경기도 의성군의 쓰레기 산 (출처: 네이버 포토뉴스) 님비 아닌 상생으로 나아가야 할 때 이런 님비현상은 공유지의 비극 이론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공유지의 비극 이론이란 마을 주민들이 자유롭게 사용 가능한 목초지가 주어졌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목초지의 한계치를 넘어선 수의 양을 방목했고, 그 결과 목초지가 황무지로 변했다는 이론이다. 이는 개인의 사리사욕을 극대화하는 것이 결국 공동체의 비극을 가져다준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님비현상도 개인이 조금씩만 양보했으면 공동의 이익을 도모할 수 있지만 개인의 이익만 추구해 국가, 우리 사회의 손실을 입게 되는 현상이다. 이렇듯 공유지의 비극처럼 우리 사회에 부정적이 결과를 초래하는 님비현상을 해소하기 위한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근본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공공재를 마음대로 사용 가능한 주인없는 것이 아닌 나의 것으로 여기는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 공유지의 비극의 경우 마을의 공공재인 목초지를 무분별하게 남용했는데 이는 마을의 자원이 곧 나의 자원이라는 인식의 부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공공재에 대한 주인의식을 가졌다면 자원을 마구잡이로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공공자원이 남의 것이 아닌 우리의 것이며 그 손실이 곧 내 것의 손실이라는 주인의식 함양이 요구된다. 이런 인식의 변화가 이루어졌을 때 원만한 합의를 통해 님비현상을 극복할 수 있고 다 함께 잘 살아가는 상생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
제 675 호 5월은 가정의 달, 누구에게나 따뜻한 달일까
(출처:불교방송) 우리는 5월을 흔히들 ‘가정의 달’이라고 칭한다. 5월에는 어린이날(5월 5일), 어버이날(5월 8일)과 같이 가정과 관련된 기념일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두가 이러한 ‘가정의 달’을 따뜻하게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가정의 달’이라고 불리는 5월에도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많은 아이들이 있다. 현대사회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가정폭력, 아동학대 등과 같이 가족 구성원 내에서 일어나는 폭력이 많은 충격을 주고 있다. 지난 14일, 생후 75일 된 아들을 게임을 하는 데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학대하여 숨지게 한 남자가 울산지방경찰청에 기소된 사건이 대표적이다. 정서적 피해도 가정폭력이다 가정폭력, 그중에서도 부모가 자녀에게 행하는 아동학대의 가장 대표적인 예시는 신체적인 폭력이다. 신체적인 폭력은 물리적인 힘이나 도구를 이용해 신체를 직접 가격하여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를 말한다. 교육을 핑계로 자녀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행위는 신체적인 폭력에 속한다. 아동학대의 종류에는 이러한 신체적인 폭력 이외에도 정서적인 학대, 경제적인 위협, 성적인 폭력, 방임 등 그 종류가 다양하다. 정서적인 학대는 폭언, 무시, 모욕과 같은 언어폭력으로 자녀의 자존감을 낮추고, 정신적으로 피해를 주는 행위를 말한다. 자녀를 고립시키고 말과 행동을 통해 자녀를 억압하는 행위 역시 정서적인 학대에 해당한다. 또한 대부분 “학대”라고 인지하지 못하지만, 부모의 싸움도 학대의 요소가 될 수 있다. 부모의 싸움으로 인해 아이에게 스트레스 환경이 조성되고, 그것이 자녀에게 일시적으로 혹은 장기적으로 정신적인 피해를 주는 것도 정서적인 학대가 될 수 있다. 생활비를 제대로 지원하지 않아 생계유지를 어렵게 하여 경제적인 위협을 하는 것도 아동학대의 한 종류이다. 아직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한 자녀를 방치하여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하도록 하는 것을 폭력의 한 종류로 보는 것이다. 가정 내에서 일어나는 성적인 폭력은 부모가 자녀에게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는 행위를 하거나 원치 않는 성관계 혹은 그 밖의 유사 성행위를 강요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물리적인 고통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 정신적인 고통도 초래할 수 있다. 무관심과 냉대로 인해 자녀를 위험 상황에 방치하는 행위도 아동학대의 한 종류가 될 수 있다. ‘사랑의 매’, 아이들의 감정은 달랐다 가정폭력이 발생의 많은 이유는, 아동학대를 한 가정의 개인적인 일로만 여기며 가족 구성원들이 알아서 해결해야 할 문제로 치부해버리는 정부의 태도와 ‘훈육’과 ‘폭력’을 구별하지 못하는 우리의 잘못된 인식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부모가 아이의 행동을 좋은 쪽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자녀를 때리는 행위를 ‘사랑의 매’라고 표현하며 마땅히 해야 할 ‘훈육’으로 여긴다. 정말 ‘사랑의 매’라고 표현되는 이 폭력이 교육적으로 효과가 있는 것일까? 영국 세이브더칠드런에서 2001년 아이들에게 맞았던 경험을 어떻게 느끼는지를 쓰게 했다. 그때 아이들은 “상처받음, 무서움, 속상함, 겁이 남, 외로움, 슬픔, 성남, 버려진 것 같음…” 등의 감정을 서술했다. 체벌에 대한 느낌을 다양하게 표현했지만 그중에 미안하다거나 반성한다는 느낌을 말한 아이는 없었다고 한다. 체벌이 교육적 효과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아이들에게 심리적·정서적으로 피해가 된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이다. 폭력은 폭력을 낳는다 사람들이 흔히 자녀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는 이유로 “내가 맞고 자란 덕분에 이렇게 잘 자랐다”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이어져 아직까지도 부모의 폭력이 “사랑의 매”로 잘 포장되어있는 것이다. 그러나 폭력이 ‘올바른 성장’의 필요조건이라는 것은 근거가 부족하다. 자신이 부모로부터 사랑의 매라고 포장된 폭력을 당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자랐을지 알 수 없다. 또한 맞고 자라지 않았다면 오히려 폭력에 민감한 감수성을 가진 사람이 됐을 수도 있다. 어릴 적 폭력은 그 사람에게서 미화되어 폭력을 대물림하게 되는 주장을 하게 되고, 폭력에 대한 감수성이 낮은 사람을 만든다. 가해자는 체벌이 사랑이라고 가르치며 “맞을 짓 했다”라는 논리로 내면화한다. 피해자는 스스로를 탓하며 ‘가해자는 나를 사랑하고 아껴서 때리는 건데 내가 왜 이리 잘못했을까’라는 논리를 순응하게 한다. 자신을 탓하며, 폭력의 굴레 속에 머물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사람을 때리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부모와 자녀 관계에서 “자녀”를 때리는 것은 허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실제로 2016년 경기도 가족여성연구원이 경기도민 1,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폭력허용태도〉에 대한 조사에서는 성인의 98%가 ‘상대방을 때리려고 위협하는 행동은 폭력’이라고 응답했다. 하지만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서는 ‘자녀의 습관 교정을 위해서는 부모가 자녀를 때리고 위협해도 된다.’고 답한 비율이 48.7%, ‘예의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때리겠다고 위협해도 된다.’는 35.3%, ‘공부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때리겠다고 위협해도 된다.’는 응답이 23.3%로 나타났다. 우리는 똑같은 인격체에게 다른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 우리의 그 위험한 잣대가 아이들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다. 아이들이 폭력을 내면화하고 대물림하지 않게 우리는 생각을 변화시켜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국가 정책의 변화로 이어질 수 있어야 한다. 가정폭력 근절은 생각의 변화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과거 아동 학대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근본적인 변화 없이 그저 교육을 강화하거나 추상적인 대책을 내세우고 흐지부지하게 끝났다. 그것은 우리 사회에서 “사랑의 매”라고 불리며 가정 내에서 허용되는 체벌이 근본적으로 문제다. 생각이 바뀌지 않으니 가정폭력에 대한 처벌도 미미하고, 제도도 변화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이 먼저 변해야 한다. “사랑의 매”라는 건 없다는 것을 “맞을 만한 짓은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겨야 한다. 이희수 기자 방효주 수습기자
제 673 호 당신의 소비가 환경을 아프게 할 수 있습니다
최근 환경을 보호의 목적에서 플라스틱 컵의 대안으로 텀블러를, 비닐봉지의 대안으로 에코백 사용을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텀블러는 1000번 이상, 에코백은 100번 이상 사용해야 플라스틱에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친환경적 소비로 알고 있는 사실이 왜 환경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는지 함께 알아보자. 환경문제의 대두 플라스틱 문제가 계속해서 대두되고 있다. 우리가 흔히 일상생활에서 쓰는 일회용 비닐봉투, 음료를 받을 때 쓰는 컵, 빨대 등은 모두 플라스틱이다. 이 플라스틱은 우리의 편리함을 위해 한 번 쓰인 후 바다로 버려진다. 전 세계에서 1년간 바다에 버려지는 플라스틱 쓰레기가 총 800만 톤이라는 걸 보면 엄청난 양의 쓰레기가 바다에 버려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버려지는 플라스틱은 해양생태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해양생물들이 먹이인 줄 알고 착각하여 먹어 해양생물들이 고통받고, 해양생태계가 파괴되고 있다. 이렇게 플라스틱 문제의 심각성이 대두되고 이를 인지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작년 8월 1일에는 “자원재활용법”에 따라 매장 내의 1회용 컵 사용이 금지됐고, 올해 4월 1일부터는 전국 대형마트와 백화점, 대형 슈퍼마켓에서 1회용 비닐봉지 사용이 금지됐다. 다회용 컵 사용 시 음료 가격을 할인해주는 등의 정책적 변화가 있었다. 또한 sns에서는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자는 “플라스틱 프리 캠페인”이 시행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텀블러를 sns에 인증하고 다회용 컵 사용을 지향하는 노력이 있었다. 이를 통해 실제적으로 텀블러 구매량이 급증했고, 비닐봉지가 아닌 에코백을 사는 경우가 많았다. 또 다른 환경문제 하지만 이 대안은 또 다른 환경문제를 낳는다. 텀블러와 에코백을 과도하게 많이 사다보니 오히려 일회용 컵, 비닐봉지보다 더 큰 환경문제로 대두됐다. MBC 프로그램 14F에서는 텀블러는 100번 이상 에코백을 100번 이상 사용해야 플라스틱의 대안으로 효과가 있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텀블러의 경우, 가장 비환경적인 물질에 해당되는 금속과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다. 금속과 플라스틱의 원료인 석유는 채굴할 때부터 자연에 막대한 변화를 초래하게 되는데 이는 또 다른 환경문제를 낳는다. 특히 금속 광산 주변은 폐석, 침출수, 암석먼지 등에 섞인 금속으로 인해환경이 심각하게, 장기간 파괴된다. 폐석은 광산 개발 중 발생하는 다양한 부산물들을 이야기하는데 이 속에는 중금속이 들어가 있다. 폐석이 땅과 바다로 흘러 들어가면 토양과 수질 오염으로 연결될 수 있다. 또한 침출수는 폐기물 최종처분장에서 침출되어 나온 더러운 물을 이야기한다. 침출수에는 페놀과 납과 같은 독성물질이 들어있어 환경을 오염시킬 수 있다. 텀블러를 만드는 과정에서 이렇게 환경문제가 많이 생긴다. 또한 두 번째로는 종이컵보다 텀블러가 생산 공정에서 훨씬 많은 자원과 에너지를 소모하고 오염물질도 더 많이 배출한다. 텀블러를 만드는 과정에서 금속 제련과 석유정제에는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들어가게 된다. 이는 에너지 낭비로 환경오염이 된다. 세 번째로는 세척문제이다. 텀블러는 씻어서 써야 하므로 그 때마다 몇 리터의 물과 에너지가 소모된다. 그때마다 세제가 하천으로 방출되어 물을 오염시킬 수 있다. 이 모든 걸 감안해서 일반 플라스틱 컵보다 텀블러가 친환경적이라면 1000번 이상은 사용해야한다. 하지만 2018년 11월 28일 한국소비자원에서 (사)한국부인회총본부와 공동으로 주요 도시 내 커피전문점 75개 매장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테이크아웃 이용 소비자 750명 중에서는 694명(92.5%)이 1회용 컵을 사용했고, 텀블러 사용자는 56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이 수치를 통해 우리 사회에서는 텀블러 구매율은 늘고 있지만 정작 카페에서 사용하는 비율은 낮다는 걸 알 수 있다. 환경보호의 의미가 사라진 에코백 또한 비닐봉지의 대안으로 나왔던 에코백도 “환경보호”의 목적보다 최근에는 패션 아이템으로 부각되면서 가볍게 들고, 많이 사는 페스트 패션과 함께 환경쓰레기로 전락했다. 과거 환경을 지키자는 의미로 천연 면과 같은 것을 만든 것이 ”에코백“이었지만 이제는 만들 때 새로 딴 면화를 소비하거나 합성 원단으로 만든 가방이 많다. 에코백도 생산과 운송 과정에서 지구에 오염을 더하고 있다. 또한 환경을 보호한다는 이미지도 좋고, 다른 물건들에 비해 원가가 낮기 때문에 많은 단체들이 기념품, 증정품으로 에코백을 무분별하게 프린트하다보니 오히려 환경 파괴에 일조를 하게 되는 것이다. 먹는 컵, 감자 접시, 친환경 플라스틱 그래서 진정한 대안이 되지 못하는 텀블러와 에코백 대신에 먹는 컵과 감자 접시와 같이 플라스틱 대신에 다른 대안들이 나오고 있다. 먹는 컵은 해조류를 가열시켜 녹은 것을 모양대로 굳힌 다음에 사용하는 것이다. 또한 감자 접시는 주원료인 감자로 만들고, 소금과 설탕으로 맛을 약간 첨가한 접시이다. 이 둘은 모두 굳이 먹지 않고 버리더라도 땅에 묻으면 자연스럽게 분해가 되기에 환경에 굉장히 긍정적인 대안이다. 실제로 인도네시아의 음식점에서 사용되는 방법이기에 텀블러가 근본적인 대안이 되지 못한다면 일상생활에서 이러한 컵과 접시를 도입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또한 최근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친환경 플라스틱이라는 것을 만들어냈다. 이 친환경 플라스틱은 기존 폴리에틸렌 원료에 생분해제를 1% 정도만 섞어 만든 것이다. 산화 생분해제가 플라스틱의 고분자 구조를 저분자 구조로 바꿔주는 역할을 해서 3년 이내에 이산화탄소와 물로 분해되게 한다. 이 기술을 사용한 플라스틱을 만들 수 있게 사회에서 함께 진행해야 한다. 환경을 위한 사용 환경보호의 대안으로 나왔던 것들이 무분별한 소비로 인해 대안의 의미가 사라지고 또 다른 환경문제를 야기했다. 진정으로 환경을 보호에 대안이 되려면 예쁘다고 텀블러나 에코백을 많이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현명하게 하나로 꾸준히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텀블러는 적어도 플라스틱 컵 대신 1000번 이상은, 에코백은 비닐봉지 사용대신에 100번 이상은 사용해야 플라스틱 문제의 대안으로 나온 것의 효과를 볼 수 있다. 이희수 기자
제 674 호 “홍길동전”의 저자가 허균이 아니라고?
최초의 한글소설이라고 알려진 홍길동전에 대해 최근 저자에 대한 논쟁이 제기되고 있다. 홍길동전의 작자가 허균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책이 등장하면서 이 논란이 공론화되었다. 우리가 흔히 학교에서 허균의 홍길동전이라고 배웠던 이 작품이 왜 이러한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되었는지 함께 알아보자. (출처 : 세계일보) 한문본 『홍길동전』의 발견 지난 24일, 이윤석(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교수는 400여 년 전 조선 중기 문인이 지은『홍길동전』 한문본이 발견됐다고 밝혔다. 한문『홍길동전』이 발굴된 것은 처음이며 한글 홍길동전과는 그 내용이 다르다. 지소 황일호가 지은 홍길동 일대기의 이름은 『노혁전』으로, 『지소선생문집』에 수록되어 있다. 『노혁전』은 홍길동전이 최초의 한글 소설이며 저자가 허균이라는 통념과 배치되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 자료가 밝혀지기 이전부터 『홍길동전』을 둘러싼 몇 가지 논쟁이 이어져 왔다. ‘『홍길동전』의 진짜 저자는 누구인가?’가 그 논쟁의 중심으로,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바로 『홍길동전』의 작자가 허균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모를뿐더러, 학교 교육에서 허균이 그 작자라고 배워왔기에 아니라는 것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홍길동전』의 저자를 허균이라고 알고 있을까? 이와 관련된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홍길동전에 의문을 제기한 책인 『홍길동전의 작자는 허균이 아니다』(이윤석 교수 저)를 바탕으로 알아보았다. 허균이 홍길동전의 작가가 아닌 근거 우선 허균이 『홍길동전』의 작자가 될 수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먼저, 『홍길동전』에는 허균 사후의 인물과 관청이 등장한다. 소설 속 길동은 서자라는 신분 때문에 출세할 수 없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아름다운 이름이 아니라 더러운 이름이라도 남기겠다고 말한다. 그 예로 든 사람이 바로 “옛날 장충의 아들 길산”이다. 이 내용은 거의 모든 이본에 나오므로, 창작 시점부터 들어있는 내용이다. 이 장길산은 1690년대부터 이름이 알려진 도둑이지만, 허균이 죽은 해는 1618년으로 약 70년 전이다. 더불어 작품에 등장하는 선혜청이라는 관청의 이름 또한, 처음 설치된 것은 1608년이지만 전국적으로 시행된 것은 이로부터 100년이 지난 1709년이다. 작품의 내용 이외에도 허균이 『홍길동전』의 작자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들이 있다. 첫째, 『홍길동전』과 같은 형식의 한글소설은 1800년 무렵에 나타난다. 특정한 형식의 예술작품은 특정한 시기에 비로소 나타나는 것으로, 허균이 살았던 1600년 무렵에는 이런 소설이 나올 수 없다. 둘째, 허균이 한글로 소설을 쓸 능력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 셋째, 1910년대 이전에 만들어진 『홍길동전』은 현재 수십 종 이상이 남아있다. 허균이 『홍길동전』의 작자라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이 중 어떤 것이 원본인지 결정해야 한다. 그러나 현존하는 이본은 모두 19세기 중반 이후 나온 것으로, 허균 사후 200년 이상의 시간 동안 『홍길동전』이 어떻게 전해졌는지 그 과정을 밝힐 수 있어야 허균이 그 작자라는 논의를 할 수 있다. 이렇기에 홍길동전의 작자가 허균이 아니라는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홍길동전』의 작자 문제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홍길동전』의 작자가 허균이라고 알려진 때는 언제인가?”라는 질문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한글 고소설은 작자가 알려져 있지 않지만『홍길동전』의 경우, 학교 교육에서 그 작자를 허균이라고 가르치므로, 많은 사람들이 허균 스스로 『홍길동전』을 썼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디에도 허균 자신이 『홍길동전』을 썼다는 말이 없고, 현존하는 30여 개의 이본 가운데 작자가 허균이라고 명시된 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홍길동전』의 작자를 허균이라고 알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허균이 작가라고 말한 최초의 인물 최초로 『홍길동전』의 작자를 허균이라고 언급한 사람은 경성제국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던 다카하시 도루이다. 그는 1927년 11월, 「조선문학 연구-조선의 소설」이라는 글에서 『홍길동전』의 작자를 허균이라고 밝혔다. 다카하시는 『택당집』의 ‘홍길동전’ 관련 내용을 한글소설 『홍길동전』과 관련지어 설명했다. 그는 “허균은 『수호전』을 본떠서 ‘홍길동전’을 지었다.”라는 대목의 ‘홍길동전’을 『홍길동전』과 같은 내용의 소설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다카하시에게 『홍길동전』의 작자가 허균이라고 배운 여러 경성제국대학 학생들은 후에 한국문학 연구의 1세대가 되어 이 내용을 세상에 전하기 시작한다. 다카하시 이전의 사람들이 『택당집』의 ‘홍길동전’에 주목하지 않았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당대 최고의 문장가인 이식이 한문으로 쓴 『택당집』과 한글소설 『홍길동전』은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하는 책이었다. 두 작품의 독자는 명확하게 다른 계층이었으므로, 『택당집』과 『홍길동전』을 함께 언급하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이 둘을 함께 논의하는 것은 경성제국대학 설립 이후 조선 문학 강좌가 개설되면서 비로소 가능해졌다. 이 시기 조선 문학을 가르치던 다카하시는 한문에 능통했고, 조선어도 유창했으나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조선에 대한 지식을 문헌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고, 자연스럽게 『택당집』의 ‘홍길동전’과 『홍길동전』을 같은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조선 지식인이 한글로 소설을 쓸 수 없었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허균은 한문으로 ‘홍길동전’을 썼고, 이를 후에 누군가 한글로 옮긴 것이 한글 『홍길동전』이라고 생각했다. 두 작품이 아무 관련이 없는 것이라는 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정리하자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홍길동전』의 작자는 허균이 아니다. 허균이 지었다는 ‘홍길동전’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뿐더러 심지어 그것이 실제로 존재한 것인지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글소설 『홍길동전』과 허균의 ‘홍길동전’의 내용을 비교해볼 수도 없으므로 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도 말할 수 없다. 홍길동전의 변치 않는 가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학계에서는 다양한 견해를 두고 이 문제에 대한 논쟁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이 속에서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두 가지이다. 첫 번째, 홍길동전은 저자가 누구든 그 가치는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양반 지식인이 한문으로 쓴 글 가운데 적서 차별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 내용은 많이 있지만 그들의 어떤 글에서도 적서 차별을 몸으로 깨부수고 왕이 되는 서자의 이야기는 없다. 하지만 『홍길동전』에서는 우리가 모두 알 듯 서자인 홍길동이 적서 차별을 깨부수고 직접 율도국의 왕이 된다. 이점에서 『홍길동전』의 가치가 있다. 그리고 지식인들이 사용하던 한문이 아니라 천대받던 한글로 썼다는 점은 저자가 누구든 변치 않는 작품의 가치이다. 두 번째로는 『홍길동전』에 대한 연구가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 학계에서 제기되는 논란이 어떤 것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고, 허균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다면 『홍길동전』의 작자를 허균으로 이야기해온 지난 100년의 시간을 바로잡아야 한다. 『홍길동전』을 쓴 이름 모를 작자와 그것을 즐겼던 서민들에게 이 소설을 돌려주어야 한다. (출처 : 네이버 포스트 아네마사나) 이희수 기자윤소영 수습기자
제 674 호 정신병, 개인의 병인가 사회의 병인가
피의자가 조현병 환자로 드러나면서 크게 논란이 된 진주 방화 살인사건은 제도상의 허점과 정신질환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내재된 편견을 보여주었다. 그 편견, 혐오, 낙인 등 과 함께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알아보자. 예방 부재, 예견된 범죄 지난 4월 17일 새벽 진주의 한 아파트에서 묻지 마 범죄가 발생했다. 한 40대 남성이 자신의 집에 불을 지른 후 아파트 계단에서 대피하는 주민들을 공격한 사건이다. 이로 인해 총 18명이 숨기거나 다쳤다. 안 씨의 이런 범행은 갑작스럽게 발생한 범죄가 아니라 그동안 여러 조짐을 보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안 씨가 지난해부터 같은 아파트 주민들에게 이상행동을 보였기 때문이다. 작년 여름부터 안 씨의 이상 증세는 심해졌는데, 주민들에게 고함을 지르고 오물을 뿌리는 등의 행동을 보였고 경찰이 출동한 적도 있지만 별다른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 아파트 주민들은 언제 범죄를 저질렀다 이상하지 않은 사람과 함께 두려움 속에서 생활한 셈이다. 이는 하인리히의 법칙에 대입해 설명할 수 있다. 하인리히의 법칙은 대형사고가 발생하기 전에 그 사고와 관련된 작은 사건이 수차례 일어난다는 법칙이다. 큰 사건이 갑작스럽거나 우연히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전에 소소한 징후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진주 방화 살인사건을 보면 평소 안 씨가 아파트 주민들을 대상으로 이상행동을 여러 차례 보였고 이로 인한 갈등도 존재했다. 또한, 조현병에 대한 치료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전조증상을 간과한 결과 큰 사건이라고 볼 수 있는 진주 방화 살인사건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이를 통해 사소한 문제라도 간과하고 지나치면 되돌아 올 수 없는 사고로 연결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작은 사고라도 그 사고가 발생한 본질적인 사회, 환경의 원인을 찾고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이번 사건의 경우 사건 발생 전 안씨의 행동이 여러차례 문제가 되었음에도 적절한 조치가 취해지지 않은 점이 진주방화 살인사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이다. 경찰은 안씨의 정신병 치료 기록과 이전에 치료감호소 수감 명령 기록 등을 사전에 몰랐다. 또한, 해당 지역 보건소의 중증정신질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정신건강복지센터’내에서도 안씨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이처럼 제도상의 한계들로 인해 작은 징후들이 있었음에도 큰 사건을 미리 예방하디 못한 것이다. 정신병을 잠재적 범죄자로 낙인찍는 사회 이와 더불어 해당 사건에서 가장 논란이 된 점은 피의자 안 씨가 조현병 환자이며, 범죄를 저지르기 전 2년 9개월간 조현병에 대한 치료를 중단했다는 점이다. 조현병이란 정신분열증으로 왜곡된 인지, 비정상적인 사고와 행동 등을 불러일으키는 정신장애를 의미한다. 진주 방화 살인 사건의 피의자가 조현병 환자인데 드러남에 따라 조현병 환자들이 벌인 범죄가 두드러지게 보도되었다. 이에 따라 심신 미약하게 대한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는 청원이 등장하는 등 우리 사회에서 조현병을 포함한 정신병 환자의 범죄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사실 조현병 환자들의 범죄율은 일반 사람의 범죄율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7년 대검찰청 통계에 따르면 정신질환자가 범죄를 저지른 비율은 0.136%인 반면, 같은 기간 동안 발생한 전 인구의 범죄율은 3.93으로 2배 이상 차이 났다. 그리고 강력 범죄의 비율도 정신장애인의 경우 0.014%로 전체 강력범죄율인 0.065보다 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현병을 비롯해 정신병에 대한 염려가 큰 것은 그동안 우리사회에 내재해왔던 사회적 편견같은 현실적인 장벽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은 정신실환자들이 사회에 복귀하여 살아가기 어렵게 만들었고 정신질환을 수치로 여기는 우리 사회의 풍토는 적극적인 치료로 극복하기 보다는 숨기기 급급하게 만들었다. 정신병에 대한 편견이 치료만 하면 나아질 수 있는 병을 숨기게 되서 오히려 더 키우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정신질환을 밝히고 치료하는 사회 되어야 앞서 살펴보았듯이 현실적으로 정신질환 환자들을 적극적으로 관리할 것 수 없는 제도의 한계와 정신질환자를 잠재적 편견이 우리 사회의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따라서 이에 대한 해결 방안이 필요하다. 먼저, 제도상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신질환에 있으면서 전과 등 위험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전과자에 대한 정보가 경찰 즉 수사당국에 즉각적으로 공유되어야 한다. 이는 인권문제와 상충되어 입건되지 않으면 피신고자의 구체적인 정보 즉 전과, 의료기룍 등을 확인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정신병 환자는 눈으로 확인할 수 없기에 경찰들이 즉각적으로 판단할 수 있도록 정보 공유가 요구된다. 다음으로 정신질환에 대한 사회적 편견의 경우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의 인식 변화이다. 정신질환 환자들의 정신병이 사회에서의 낙인으로 이어지고 결국 이방인으로 배척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이루어져야 한다. 먼저 정부 차원 혹은 지역단위의 차원에서 캠페인이나 홍보를 이용해야 한다. 정신질환이 치료가 가능하고 일반적인 생활을 할 수 있음을 알려야 하는 것이다. 또한, 정신질환자에 대해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 프로그램이 병행되어야 한다. 정신질환자들은 겉보기에는 일반인과 같지만 마음의 병이 있기에 세심한 배려와 주의가 요구된다. 따라서 정신질환자를 알고 존중하여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이 필요하다. 이런 노력들을 통해 우리나라에서 과거부터 고착화된 정신병에 대한 혐오, 두려움 등의 편견이 한 번에 사라질 수는 없겠지만 서서히 인식이 개선될 것으로 보인다. 정신질환 환자들이 자신의 병을 숨기지 않고 적극적이고 꾸준하게 치료받고 사회에서는 이를 포용하고 나아가 회복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의 고리가 만들어지는 세상이 되길 바란다.
제 672 호 10년 간 숨겨진 진실 이제는 밝혀져야 할 때
▲국민 청원에 올라온 재수사 요청 2019년 03월 12일 “故장자연씨의 수사 기간 연장 및 재수사를 청원합니다.”라는 제목으로 국민청원이 시작됐다. 그리고 청원이 시작된 지 10일 만에 68만 명이 넘는 동의를 얻었다. 이 사건은 10년 전인 2009년 03월 탤런트 고 장자연씨가 사망하면서 남긴 문건에서 유력인사들의 술접대와 성접대를 강요받았다는 이야기가 세상 밖으로 드러나며 수사에 착수했지만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는 사건이었다. 수사 과정 중의 의문들 장자연씨의 사망 이후 이 사건에 대한 5개월의 검·경 수사가 이뤄졌다. 이 수사에서는 의문점들이 많았다. 문건에 드러난 사람들은 하나도 기소가 되지 않았고, 소속사 사장과 매니저만 각각 ‘폭행 및 협박’ ‘명예훼손’으로 징역 4월과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문건에 언급됐던 조선일보 일가가 장자연씨와 통화한 사실, 술자리에서 만난 사실이 밝혀졌지만 피의자로 입건되지 않았다. 의문이 드는 건 이뿐이 아니다. 과거 수사 진행되는 과정에서의 부당함과 부실함에 대해 논란이 이어져오고 있다. 윤지오씨가 이 사건에 관해 계속된 증언을 하면서 낸 책인 “13번째 증언”에 따르면 윤지오씨가 수사를 받으러 간 시간대는 밤 10시에 시작해서 새벽이나 아침까지 조사를 받았고, 분위기가 굉장히 강압적이고 마치 죄인의 느낌을 줬었다고 전했다. 또한 사생활 침해도 있었다고 한다. 참고인 조사를 할 때 윤지오씨의 통장내역 조회와 잔고 체크를 하고 심지어 윤지오씨의 부모님 잔고까지 체크를 해 윤지오씨 아버님이 낸 세금이 본인(수사경찰)의 연봉보다 많다고 웃으면서 말했다고 한다. 또한 수사의 부실함도 지적했다. 정확하게 이 두 줄이 무슨 이야기인지 윤지오씨는 밝히지 않았지만 문건에 언니가 자필로 쓴 딱 두 줄이 가장 핵심적인 부분인데, 그 두 줄에 관해서는 전혀 수사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지나가버린 공소시효 이렇게 부실 수사와 수사과정에서의 부당함, 그리고 의문들이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은 채 사건은 10년의 시간을 지나왔다. 과거 수사가 진행됐던 성접대 강요, 강제추행 등 혐의는 대부분 공소시효가 10년 이하이고 장자연씨 사망 후 진행된 수사 과정에서 직권남용(7년)이나 직무유기(5년)가 있었더라도 이 역시 공소시효가 지났다. 이젠 입증돼도 처벌할 수 없다. 하지만 윤지오씨의 용기로 국민들이 이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되어 관련 국민청원이 대통령에게 전해졌고, 문대통령은 “공소시효가 끝난 일은 그대로 사실 여부를 가리고, 공소시효가 남은 범죄 행위가 있다면 반드시 엄정한 사법처리를 해주기 바란다”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10년 동안 침묵하던 과거 장씨와 같은 소속사였던 배우 이미숙이 입을 열면서 사건은 진실로 다가가고 있다.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길 우리 사회가 고 장자연씨의 억울한 죽음을 통해 반성해야할 것들이 많다. 먼저 제2의, 3의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기지 않게 법체계를 더 단단히 해야 한다. 당시 배우의 꿈을 안고 소속사에 들어왔지만 부당한 계약 때문에 대표의 강요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던 구조는 당시 힘없던 배우지망생의 꿈을 짓밟았다. 여전히 연예계 많은 곳에서는 부당한 계약을 통해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는 더 이상의 부당 계약의 끈을 끊어야 한다. 또한 과거의 경찰의 행동이 잘못된 것이 있다면 그것을 찾아내 반성하고 개선해 나가야한다. 이 사건의 진상조사단은, 당시 검찰은 적극적인 허위진술을 한 것이 피의자임에도 불구하고, 현장에 있었던 핵심목격자의 진술이 허위라고 판단하면서도 그 동기에 대해 아무런 확인을 하지 않았고, 전체적으로 일관성이 있는 위 핵심목격자의 진술을 배척한 채, 신빙성이 부족한 술자리 동석자들의 진술을 근거로 불기소처분한 것은, 증거판단에 있어 미흡한 점이 있고 수사미진에 해당한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경찰과거사위원회는 진상조사단의 증거관계와 진술에 대한 비교·분석이 면밀히 이루어졌고, 수사과정의 문제점에 대한 지적도 타당하며, 공소시효가 임박하였으므로 검찰에서 피해자에 대한 강제추행사건을 재기하여 재수사를 통해 사안의 실체를 명확히 규명할 필요가 있다고 결론지었으며 이에, 위원회는 진상조사단의 의견을 수용하여 위와 같이 재수사를 권고하였다. 과거의 잘못은 인정하고 반성하며, 다시는 수사과정 중 부조리가 일어나지 않도록 법안을 보안해야 한다. ▲윤지오 씨가 진실을 밝히기 위해 참고인 신분으로 검찰에 출석한 모습 (출처:파이낸셜뉴스) 우리는 10년이라는 시간을 거쳐 어렵게 진실의 일부를 보게 되었다. 윤지오씨의 용기와 국민들의 움직임이 함께 쌓여 진실을 보게 되었다. 진실이 밝혀지고 더 이상 “장자연 사건”이 아닌 “가해자 000 사건”으로 불릴 수 있는 사회를 기대한다.
제 672 호 50% 연동형 비례대표제, 국민의 뜻을 담는 선거제 될까?
최근 여야4당이 투표연령 하향을 검토하면서, 대학생들 사이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다가오는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 대비해 논의 중인 새로운 선거제도는 마무리될 수 있을까? 선거제개편은 필요할까? 선거제 개편이 필요한 이유는 정당 지지율을 최대한 국회의원 수에 반영하기 위해서이다. 즉 비례성과 대표성을 강화하기 위함이다. 지금까지 25~30%의 정당 지지율을 얻고도, 45~50%의 의석수를 가져갔던 시스템의 문제점을 개선하려는 것이다. 이는 정당 투표율이 의석수에 반영되지 않기 때문으로 선거제 개편을 통해 의석수에 정당 투표율을 포함할 수 있게 한다면 유권자의 투표가 왜곡되지 않게 할 수 있다. 이는 곧 다당제로 이어지는데 선거제 개편안에 반대하는 견해는 다당제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다당제란 의석의 과반수이상을 차지하는 정당이 없어 3개 이상의 정당이 존재하는 것인데 우리나라의 정치와는 맞지 않다는 것이다. 즉, 정당이 자주 뭉치고 흩어질 수 있는 성격을 가진 다당제가 오히려 정치적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제안된 선거제가 너무 어렵다는 비판 등의 의견이 존재한다. 그러나 어떤 선거제도 완벽할 수 없다. 정치적, 현실적 제약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점을 염두에 두고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최선의 결정을 해야 한다. ▲선거제도 개편을 위해 단식 중인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와 이정미 정의당 대표 (출처:연합뉴스) 선거제개편 진행상황 지난 15일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여야 4당이 주말 사이 선거제 개편안에 대한 잠정 합의안을 도출했다. 의원정수는 300명을 유지하면서, 지역구와 비례대표 의석을 현행 253:47에서 225:75로 상향 조정하고, 비례대표 75석 가운데 50% 연동형을 적용해 뽑는다는 것이다. 의원정수 확대에 반대하는 여론을 감안해 마련한 타협안이다. 먼저 의석수가 253→225로 줄어들면 지역 간 통폐합이 예상된다. 또한, 비례대표 선출 방식을 기존의 ‘병립형’에서 ‘연동형+병립형’으로 바꾸는 것을 제안했다. 지역구 선출 결과와는 별개로 정당별 득표율에 비례하여 비례의석 배분이 이루어지는 병립형과 달리 연동형 제도는 지역구의 의석 배분 결과가 정당명부의 의석 배분에 영향을 미친다. 이 방식을 통하면 지역구 투표율이 정당 투표율 보다 낮은 경우 의석수 확보에 보다 유리해진다. 즉 거대정당보다 소수정당에 유리한 것이다. 실제로 이 방식에 따르면 더불어 민주당은 약 17석, 자유한국당은 약 13석이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 가장 큰 감소를 보일 것으로 예상되는 더불어민주당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거제개편에 합의 하려는 것은 소수당과의 연대를 위함이다. 반면, 제1 야당인 자유한국당은 비례대표제를 없애자는 완전히 상반된 주장을 내놓은 상황이다. 비례대표제 없이 모두 지역구로만 의석수도 10% 줄인 270석을 뽑자고 주장하고 있다. ▲피켓 들고 구호 외치는 나경원 원내대표와 자유한국당의원들 (출처:연합뉴스) 도출되지 않는 합의점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국민을 대표하는 국가의 최고의사결정기관의 의원은 선거로 선출된다. 그 국회의 의원을 선출하는 구체적인 절차를 선거제도라고 한다. 선거제도에는 다양한 방법이 있는데 그 방법에 따라 선거결과, 민주주의의 질 등이 달라질 수 있어 중요하다. 현재 선거제개편은 앞서 살펴보았듯, 정당간의 합의점이 도출되지 못해 진행이 더딘 상황이다. 각 정당이 원하는 선거구 개편 내용은 모두 다르지만 크게 보았을 때, 더불어민주당,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 정의당과 자유한국당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 갈등은 선거구 개편안을 페스트트랙으로 추진할 것인지를 두고 더욱 심화되었다. 패스트트랙이란 해당 안건을 신속 처리안건으로 지정하는 것으로 절차상 한국당(113석) 없이도 여야 4당이 합의안을 가결할 수 있다. 그러나 선거제 개편과 함께 패스트트랙 안건에 포함된 공수처법의 기소권과 관련해 더불어민주당과 바른미래당의 의견이 엇갈려 이마저도 난항을 겪고 있다. 이러한 현재 상황은 치킨게임이론으로 이해할 수 있다. 치킨게임이란 두 팀 중 어느 한쪽이 포기하면 다른 쪽이 이득을 보게 되며, 각자의 최적 선택이 다른 쪽 경기자의 행위에 의존하는 게임을 말한다. 즉, 한쪽이 포기하면 다른 쪽이 포기하지 않으려 하고, 한쪽이 포기하지 않으면 다른 쪽이 포기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선거제개편도 여야4당과 자유한국당 사이에서 양보가 없다면 합의점에 다다르기 어렵다. 국민의 뜻을 담는 선거제 현대사회의 변화에 따라 사회문제는 보다 다양하고 복잡해지고 있다. 이런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선거제도도 국민의 뜻을 반영하기 위해 변화할 필요가 있다. 현대사회의 과도한 경쟁에 밀려난 소수집단들이 정치에 소외되지 않도록 대의민주주의를 강화해야 하는 것이다. 선거제도는 대의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만큼 신중히 결정해야할 중요한 사항이다. 따라서 각 정당은 선거제 개편을 자신의 이익관점에서만 바라보기 보다는 더 나은 선거제가 될 수 있도록 넓은 시각으로 보며 협상해야 할 필요가 있다. 또한, 앞에서 언급했듯 치킨게임 같은 선거제 개편을 둘러싼 갈등을 해결하고 합의점을 도출하기 위해서는 유권자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내야 해야 한다. 이를 통해 국회에 시민들의 다양한 목소리가 담길 수 있기를 바란다.
제 671 호 계속되는 산업재해, 근본적인 문제해결 필요
우리 사회에서는 빈번하게 산업재해가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그때마다 개인에게 책임을 돌리고, 부조리를 해결하려는 노력은 미흡했다. 왜 노동자를 위한 정책은 근본적인 변화가 없었는지 알아보자. ‘죽음의 외주화’, 목숨 위협받는 청년 노동자들 2013년 1월 성수역, 2015년 8월 강남역에서 두 명의 수리공이 스크린도어를 정비하다가 전동차에 치여 사망했다. 그리고 2016년 5월 서울 지하철 구의역에서 똑같은 이유로 하청업체 소속 김 군이 전동차에 치여 사망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공사의 무리한 외주화로 인해 산업안전보건법이 지켜질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발생한 구조적인 문제였다. 서울시 구의역 사고 진상규명위원회가 작성한 사고 조사 보고서를 보면 원청인 서울메트로가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4~6명의 하청업체 직원에게 48개 역을 담당하게 해 근무 안전수칙인 2인1조 작업을 불가능한 상태로 내몬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문제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변화는 없었다. 구의역 사고 당시 하청업체였던 은성PSD는 사고 6개월여 만에 한국철도공사의 스크린도어 입찰에 성공했다. 2018년 12월 10일 밤에는 한국발전기술 소속의 24세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씨가 태안화력발전소에서 태안화력 석탄이송 컨베이어벨트 기계에 끼어 사망한 사고가 났다. 이 사건 또한 앞에서 언급한 사건들과 다르지 않았다. 하청업체의 무리한 가격 경쟁으로 비용 절감이 필요했고 그것이 인력 절감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2인 1조로 일하는 안전수칙은 지켜지지 않았고 혼자서 일하던 하청업체 소속 비정규직 노동자는 무리한 일을 하다가 사망했다. 실제로 고(故) 김용균 노동자가 일했던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적발 사항이 1029건에 달했다. 이 산업안전보건법이 잘 지켜지기만 했더라도 김용균씨의 현재는 달랐을 지도 모른다. 이 사건들은 우연한 일치가 아니다.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인 ‘위험한 외주화’와 ‘법의 무력화’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이 사건들이 발생한 후 산업안전보건법이 28년 만에 개정되었다. 하지만 이 대안은 본질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보건법이 강화된다고 해도 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면, 그리고 위험한 외주화의 구조가 변하지 않는다면 또 다른 피해가 일어날 수 있다. 문제점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데도 왜 이러한 구조가 지속되고 있는 것일까? 죽음의 책임은 누구에게 우리나라에서는 산업재해가 사회문제로 치환되기 어렵다. 실제로 하루 5~6명이 일하다 사망하는 곳이 한국이다. 하지만 이런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대부분의 회사는 그 원인으로 노동자 개인 책임을 언급하고, 유족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 고인의 죽음을 운명적 시선으로 보고 개인의 잘못으로 돌리게 된다. 또한 사람들은 회사를 한국정서상 ‘한가족’이라고 생각하기에 문제제기를 꺼린다. 산재 사망의 특성을 ‘사고’로 제한하려는 성향이 크다는 점도 산재가 사회문제로 치환되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이다. 사고로 치부해버리면 안전설비를 제대로 하는 것으로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지만 구조적인 문제는 건드리려면 정치적인 문제로 넘어가야한다. 근본적인 문제인 구조를 변화시켜야하는데 많은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이 문제가 넘어가는 것을 꺼려한다. 비정규직 고용이 안전문제를 증가시킨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지만 한국 사회 시스템을 돌아가게 하는 기저에는 비정규직 사용이 큰 역할을 하고 있고 그것을 부정하기 어렵다는 정서가 깔려있어 사람들은 이 명제를 일반화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사후 보완식의 해결책이 진행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노동자다 하지만 노동자의 일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흔히 특성화고, 전문대를 졸업해서 일을 하는 사람들을 노동자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불로소득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회사에 종속된 노동자이며 구조적인 착취를 당하고 있다. 철도 그리고 화력발전소 등의 노동자의 착취와 죽음은 한정된 노동 현장에서 일어나는 특수적인 상황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모든 노동자는 공장부속품처럼 다뤄지며 누구나 ‘죽을 위험’이 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식의 문제 해결을 하는 모습을 바로잡아야한다. 산업안전보건법 개정 뿐 아니라 외주화와 같은 구조적 문제의 대안이 필요하다. 또한 노사정위원회를 활성화하고 근로감독관을 더 많이 두고, 프랑스 독일처럼 노동교육을 통해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해야한다. 그래서 우리 사회가 노동자의 안전이 보장된 나라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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