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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

제 705 호 [책으로 세상읽기] 섬세하고 조심스러운 이들을 위한 놀이터, ‘목소리를 드릴게요’

  • 작성일 2022-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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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4111
김지현

섬세하고 조심스러운 이들을 위한 놀이터, ‘목소리를 드릴게요’

저자 정세랑|아작 |2020.01.06.


  <목소리를 드릴게요>는 데뷔 10주년을 맞은 정세랑 작가의 첫 SF 소설집이다. 2010년부터 2019년까지 저자가 쓴 거의 모든 SF 단편을 모은 것으로, 지금 이곳, 현재의 한국 사회에서 사람들, 특히 여성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몰락해가는 인류 문명에 관한 경고를 담은 8편의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문명이 잘못된 경로를 택하는 상활을 조바심 내며 경계하면서도 미래의 사람들이 이 시대를 경멸하지도 않아도 될 방향으로 궤도를 수정할 수 있는 좋겠다는 정세랑 작가의 바람이 들어가 있는 단편집이다.


  정세랑 작가는 1984년 서울에서 태어나 2010년 <판타스틱>, <드림, 드림, 드림>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13년 <이만큼 가까이>로 창비장편소설상을, 2017년 <피프티 피플>로 한국일보문학상을 받았다. 대표작으로는 소설집 <옥상에서 만나요>, 장편소설 <덧니가 보고 싶어>, <지구에서 한아뿐>, <재인, 재욱, 재훈>, <보건교사 안은영>이 있다. 작가 정세랑은 특유의 문체와 현실에 독특한 상상을 더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이 특징이다.


  책에 실린 여덟 가지 단편 중 인상 깊게 읽었던 <11분의 1>과 <리셋>을 간략하게 소개하겠다. <11분의 1>은 자기가 사랑하던 동아리 선배, '기준'을 대학 동아리 선배들을 따라가 남아공의 비밀스러운 지하 실험실에서 동결된 상태로 다시 만나게 된 이야기이다. 암 투병으로 사실상 죽게 된 남자를 사랑하는 주인공 유경은 과학 기술을 이용해 기준을 살리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살리고 나서 기준은 생명의 값, 빚을 갚기 위해 우주로 떠나야 하는 고난과 시련이 닥친다.


  "기준이를 살리는 거야. 여기서 기준일 사릴 거야. 상태가 너무 나빠지기 직전에 이곳으로 데려왔어.“


  주인공인 '유경'이 '혜정'이라는 인물에게 보내는 이메일 편지 형식으로 서술되는데, 이러한 어투가 상황을 조금 더 애절하게 보이도록 한다. 유경은 균형이 무너진 상태에서 어떻게든 균형을 찾으려는 인물이다. 이 인물이 느끼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책을 읽는 독자에게도 그대로 느껴져서 사랑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또 사랑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너는 오지 않아도 괜찮아. 나는 널 한 번 더 본 것만으로 그 추운 곳에 가서 죽을 수 있어."


  <리셋>은 이 세상을 리셋하기 위해 나타난 지렁이를 닮은 생명체에 관한 이야기이다. 

  "생각해보면, 지렁이들이 내려오기 전에 끝나지 않은 게 신기하다. 우리는 행성의 모든 자원을 고갈시키고 무책임한 쓰레기만 끝없이 만들고 있었다. 100억에 가까워진 인구가 과잉생산 과잉소비에 몸을 맡겼으니, 멸망은 어차피 멀지 않았었다.“


  <리셋>의 지렁이가 등장하기 전의 세상은 현재 우리 사회와 너무나 닮아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현실과는 다르게 <리셋>에서는 지렁이를 닮은 생명체가 나타나 플라스틱을 먹는다. 플라스틱을 먹고 결국은 인류의 문명까지 앗아간다. 하지만 리셋이 된 후의 세상은 땅이 비옥해졌고, 생필품을 낭비하지도 않았으며 동물들을 필요 이상으로 괴롭히고나 건들지도 않는다. 지렁이로 인해 생긴 굴은 지하 도시로 활용해 순환 시스템을 만들었다. 우리의 지구는 어쩌면 이미 멸망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재활용은 자기 기만이고 쓰레기만 나눠서 쌓았을 뿐 실제 재활용률은 형편없다. 


  이 책은 SF 장르이지만 현실에 와닿는 것이 많아 읽으면서 조금은 무섭기도 했다. 폭력과 같은 과거에는 당연시되었던 일들을 현재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무자비하고 폭력적인 경우가 많다. 생각해보면 작가의 말처럼 미래 세대들은 지금 우리의 태도, 지구를 낭비하는 태도를 바라보며 역겨워할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표지의 일러스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다. 표지에서 각 이야기의 주인공을 찾아보는 것도 또 하나의 재미라고 생각한다. 정세랑 작가의 <목소리를 드릴게요>는 <11분의 1>, <리셋> 말고도 다양하고 재미있는 여섯 가지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각각 다른 분위기의 이야기들은 생각해 볼 거리가 많지만 분명 재미도 있어서 소설로써 가볍게 읽고 싶은 사람에게도 추천한다. 



이동주 수습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