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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

제 679 호 잊어서는 안 되는 이름

  • 작성일 2019-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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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4268
방효주

  영화 <김복동>


  우리 사회에서 어떤 대상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은 확 불타올랐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점점 사그라진다. 그리고 그 대상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힌다. 모든 사회적 이슈가 이렇듯, 일본군 ‘위안부’와 관련된 문제 역시 막 대두하기 시작되었을 때에는 세계적인 관심이 쏟아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싸움이 길어지자 사람들은 점점 지쳤고 ‘위안부’라는 이 세 글자는 누군가의 관심 속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한일 ‘위안부’ 합의 이후로 이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줄 로만 아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해 조금만 더 관심 있게 들여다본다면 전혀 해결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영화 ‘김복동’은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세세한 부분들에 대해서 잘 알려주고 있다. 수요시위에 관한 이야기, 대사관 시위에 관한 이야기, 평화나비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소녀상과 한일 ‘위안부’ 합의에 관한 이야기. 영화 ‘김복동’은 이러한 이야기들을 김복동 할머니를 통해서 풀어낸다.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진행되는 이 영화는 김복동 할머니의 일생의 일부를 담아내고 있다. 김복동 할머니는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라고 밝힌 뒤로, 우리나라를 비롯해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
며 일본의 만행에 대해서 밝혔다. 그리고 그런 할머니의 노력과 다른 ‘위안부’ 피해자들의 노력, 같이 싸워주었던 시민 단체와 학생들의 노력 끝에 일본은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후 일본이 취한 조치는 사죄가 아닌 ‘협정’이었다. 협정은 할머니들의 의지와 의견과는 상관없이 진행되었다. 할머니들은 협정 사실과 협정의 내용을 뉴스 기사를 통해 알게 되었다. 정부는 할머니들을 앞세워 배상금을 받아냈지만, 그 배상금을 아직도 할머니들에게 돌려주지 않고 있 다. 그리고 돈이 아닌 사과를 요구했던 할머니들에게 일본은 끝내 사죄하지 않았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고(故) 김학순 할머니의 1991년 첫 증언으로 시작되었다. 그 뒤로 수년간 많은 사람이 싸워왔지만 아직도 일본의 사과는 못 받아낸 상황이다. 그리고 살아있는 피해자 할머니들의 수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김복동 할머니 역시 올해 1월, 93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건강이 안 좋아 병실 에 누워계시던 할머니가 남긴 말씀은 ‘집에 가야 한다.’였다. 집에 가야 한다고 할 일이 아직 남았다고, 할머니는 그렇게 말했다. 아직 남아있는 그 ‘할 일’은 누가 해결해 나가야 할 문제일까.  


방효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