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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

제 679 호 [사설] 대한민국과 정의사회

  • 작성일 2019-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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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4227
이해람

오래 전부터 인간은 공정성에 기초한 정의로운 사회와 국가를 갈망해왔다. 플라톤은 저서 “국가”에서 어떻게 해야 정의로운 국가가 완성될 수 있을 것인지 고민하며 사회적 직분의 선발과정을 강조했다. 그는 국민을 세 부류로 공정하게 선발하여 각각의 임무를 부여했다. 그중 올바른 지식과 전문성을 갖춰 국가운영을 책임지도록 선발된 최상위 엘리트계층에게는 사유재산은 물론이고 친자 양육권까지 박탈한다. 정치·사회의 지도자가 사리사욕에 얽매여 공정성을 훼손하면 정의사회의 실현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민주사회에서 이러한 구상은 인권 침해적 조처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오랜 이론탐구와 실무를 거쳐 최종 선발된 위정자에게서도 이기심 극복은 어렵다는 플라톤의 고민이 엿보인다.


공정과 정의를 향한 인간의 노력은 플라톤 이후에도 지속되어 지금은 3권 분립에 기초한 대의 민주주의 정치체제가 널리 확산되어 있다. 서양에 비해 민주적 정치이념을 다소 늦게 접한 대한민국도 지난 한 세기 동안 갖은 내우외환을 거치며 국민의 주권에 민감한 신흥 민주주의 국가로 성장했다. 정치이념을 서로 달리하는 정당들은 각기 정책과 공약을 통해 정의로운 사회를 약속하고 있다. 그런데 정의사회란 다름 아닌 기회의 평등과 사회적 경쟁을 수반하는 선발의 공정성이 지켜지는 곳이다. 따라서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할 것’이라는 새 정권의 선언적 약속에 사회정의를 갈망하던 국민의 가슴은 설레었을 것이다. 문제는 평등과 공정성 같은 이상적 가치가 정치구호의 차원을 넘어 어떻게 현실에 정착될 수 있는가이다.


정의로운 사회는 위정자들이 평등한 조건과 공정한 선발경쟁을 모범적으로 준수하고 국민이 이에 동참할 때 실현된다. 따라서 정치 지도층은 법적 기회평등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국민 다수가 경제·사회·문화적 위계와 차이에 의해 조건적 불평등에 처할 수 있음을 공감하고 염려할 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 이념적 주장 이전에 실천행위에 필요한 자기 비판적 공감·실천능력을 갖춰야 한다. 또 재력, 정보, 사회적 자본의 이기적 활용을 통해 공정성을 기만하는 파렴치 행위가 정치의 진영논리를 넘어 상식적 기준과 판단에서 배척될 수 있어야 한다. 공공적 신뢰에 민감해야 할 정치인과 사회 엘리트층이 당파 논리적 독선으로 평등과 공정성의 기본정신을 훼손한다면 정의사회는 그저 선언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민생의 안정과 사회정의 회복을 내세우며 정권이 몇 차례 바뀌었음에도 입법 권력은 여전히 정치적 다툼질에 그리고 사법 권력은 국민적 불신에 빠져있다. 국민의 행복과 정의사회를 표방하는 정치행위와 법치행정이 진영논리나 집단적 이해관심에 터한 정치 공학적 활동으로 축소되는 양상은 매우 걱정스럽다. 평등이나 공정성의 본질은 물론 실천과정의 도덕성 문제마저 외면한 채 사회분열과 갈등을 심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진정 정의로운 민주사회를 지향한다면 위정자들 스스로 기회평등과 공정한 선발에 대한 약속을 자신의 삶에서 실천해내야 한다. 양심에 근거해 행위하고 민초의 처지와 희망을 공감하는 정치인과 사법·행정 관료가 주류일 때 정의사회는 물론 국민의 정치의식도 성장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