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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

제 747 호 [영화로 세상읽기]성매매에 대한 도발적인 질문, 성노동은 노동이 될 수 있는가? [아노라]

  • 작성일 2025-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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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범상

▲ <아노라> 포스터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의 오프닝, 카메라는 외설적인  춤을 추는 스트리퍼들을 지나 한 사람 앞에서 멈춰 선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아노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스트리퍼, 영화의 주인공  애니이다. 그는 늦은 밤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그에게 돈을 지불한 사람들을 위해 춤을 추다 지친 얼굴로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간다. 낡은  집에 도착한 애니는 밥도 먹지 않은 채 잠에 든다. 그러던 애니에게 러시아 재벌 2세 이반이 넝쿨째 굴러들어 온다. 그는 이반에게 일주일간 가짜  연애를 제안받고, 일주일이 끝나는 날에는 비밀 결혼을 제안받는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애니는 이반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고 결혼하기로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반의 부모님께 둘의 비밀 결혼 소식이 알려지고, 이반은 부모에게 혼나지 않기 위해 애니를 버리고 도망친다. 그렇게 애니는  이혼 무효소송에서 다시 이반과 마주한다. 이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한 번도 울지 않았던 애니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울음을 토해낸다.

  

  제77회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  제97회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각본상 비평상을 받은 션 베이커 감독의 아노라는 칸영화제 공개직후 호평을 받았고 관객의 호불호가  극명한 작품으로 세간에회자되었다. 영화는 막장 드라마와 같은 자극적인 설정과 빠른 전개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성노동을 하고 있는 스트리퍼 애니의 삶보다는 애니가 이반을 만나 신분 상승을 꿈꾸다 좌절하는 과정을 매우 선정적으로 다루고 있다. 션베이커감독은칸영화제 기자회견장에서 성노동자들의 성매매에  대해 옹호적인 입장을 보이며 개인의 신체 사용에 대한 자유와 직업 선택의 자유를 근거로 성노동이 '비범죄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바 있다. 그러나  영화 속의 연출은 성 노동자의 삶을 진정성 있게  다루었다기보다는  자극적인 볼거리를 제공하는 데 치중해 성 노동자를 왜곡하고 대상화하고 있다는  비판 또한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러한 까닭에 <아노라>의전개방식과연출이감독이 주장한 도발적인  물음 성노동자의 노동에 대한 것을 진정으로 반영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해야할 것으로 보인다.


  성매매를 노동으로 규정하고 인정할 수 있는가? 성 노동자, 그러니까 성 노동이라는 표현은 성립할 수 있는 단어인가? 감독이 주장하는 성노동, 일반적으로  통칭하는 성매매는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이들에게  마지노선이란 이름으로 주어지는 착취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매매가 노동이라는 단어로 정의될 수 없다고 주장할 수 있다. 성매매에 관한 논의는 매춘 여성의 소멸과 그들의 사회로의 복귀를 위해서 수면 위로  끌어올려야 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빈곤할 때 성매매가 아닌 다른 일을 택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필요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성매매가 존재하고, 성매매를 직업으로 삼은 사람들이  있으며, 제도적인  개선노력에도 없애기 어려운 산업이 되어 있다는 것은 큰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성매매를 택한 사람들중에는 절대적 빈곤, 즉 개인의 힘으로 자신이 처한 경제적/사회적/문화적  빈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그 현실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감독이 주장하고 있는 성노동자들을 규제하고 배제하는 것은 오히려 성매매를 더욱더 음지화하고, 성 노동자들을 범죄자로 내몰아 육체적 폭력과 경제적 착취에 더욱 노출시킨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회학자 Walkowitz는 매매춘이 불법화된 사회에서 여성의 인권유린과 육체적·경제적 착취는  더욱 가속화되고, 폭력배, 업주, 남성 고객, 경찰 그리고 성 노동자의 공생관계가 확립되고, 약육강식의 논리에 따라 여성은 더욱더 질곡의 늪으로  빠져든다고 지적했다. 사회에서 성매매가 없어지는 것이 최종 목적이라고 할지라도, 지금 당장 그들의 빈곤함을 해결해서 성매매를 택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우선 그들을 구제할 수 있는 방식을 택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이 조금 더 나은 방식으로 안전하게 일할 수 있도록 법률을 재·개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성매매를 노동으로 규제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된다고  성 노동자들이 조금 더 안전한 환경 속에서 노동의 권리를 보장받으며 일 할 수 있을까? 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이와 함께,  성매매를 성 노동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모든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폄하하고  규제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보는 입장도  있다. 성매매를 성 노동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무화하는 것이며, 이는 여성 섹슈얼리티를 정숙한 여성과  타락한 여성으로 나누어 계급화하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매매를 하는 행위를 성적결정권으로 인정하고 성매매를 하는 여성들을 일방적으로 억압받는 대상으로만 볼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 그것을 가부장적인 이데올로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쉽게 말 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것도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시작부터 끊임없이 시끄러운 영화는 단 한 순간 고요해진다.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모든  시간을 지나 애니가 눈물을 쏟아내는 순간, 영화는 애니의 목소리를 들으라는 듯 조용해진다. 애니는 오랫동안 우는 것도, 큰 소리로 우는 것도  아니다. 그저 울뿐이지만 우리의 기억 속에 강렬하게  자리 잡는다. 우리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애니의 울음은 성매매와 성 노동에 대한 복잡한 질문을 던진다. 그것이 옳든 그르든 작가가 던진 도발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논의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김지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