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47 호 [교수칼럼]“수틀리면 빠꾸”-돌아와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어른
평소 드라마에 감정이입을 잘 하지 않는 편이다. 이야기는 이야기대로, 현실은 현실대로 따로 흘러간다고 믿는 쪽이었다. 그런데 최근 넷플릭스에 공개되어 화제가 된‘폭싹 속았수다’는 평소의 내 마음과는 다른 일렁임을 주었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마음 한구석이 뭉근하게 데워졌고, 그 온기는 지금도 식지 않고 있다.
주인공 관식은 딸 금명의 결혼식 날, 신부 입장을 앞두고 이렇게 말한다.
“잘할 수 있지? 수틀리면 빠꾸. 아빠한테 냅다 뛰어와, 알지?”
인생의 중요한 출발선 앞에서도 관식은 끝까지 딸에게‘돌아올 수 있다’라는 말을 건넨다. 빠꾸해도 괜찮다고. 나는 언제나 네 뒤에 있다고.
사실 그는 늘 그렇게 말했다.
금명이가 처음 김치를 먹던 날에는“진짜 먹을 수 있어? 아니다 싶으면 빠꾸. 냅다 퉤해, 알지?”,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설레던 순간에는“일단 갔다가 아니다 싶으면 빠꾸. 냅다 집으로 뛰어와, 알지? 아빠 집에 있어. 응?”, 첫 운동회를 앞두고 들떠 있던 날에는“1등 안 해도 되니까 못 하겠으면 빠꾸. 자빠지면 아빠한테 냅다 뛰어와. 아빠 뒤에 있을게, 알지?”라고.
그 말들 속에는‘더 강해져라.’라는 말이 없다. 대신‘괜찮다’,‘돌아와도 된다.’,‘나는 여기 있다’라는 신뢰만이 있다. 관식은 말수가 적고 표현이 서툴렀지만, 그 말 한마디 한마디가 무쇠 같았다. 딸을 밀어붙이기보다, 버틸 수 있도록 품어주는 사랑. 그런 아버지가 있었기에 딸은 언제나 앞으로 걸을 수 있었다.
딸 금명이는 세상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 “아빠 짜증 나!”라고 자주 말한다. 처음엔 투정으로 들렸다. 최선을 다하는 아빠를 두고도, 복에 겨워 저런다는 말이 저절로 나올 정도로 얄미웠다. 하지만 같은 대사가 반복되면서 고백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감정이 벅차면, 말은 자꾸 거꾸로 튀기 마련이니까.
“왜 이렇게까지 날 사랑해?”라는 질문, “감당 안 될 만큼 고마워.”라는 고백. 딸은 그렇게 표현하고 있었다.
아마도 대부분의 부모는“왜 나한테 짜증을 내니?”라고 되묻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관식은 그 말을 붙잡고 따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해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만 깊어졌다. 날이 선, 느닷없는 화살조차도 받아치지 않는 어른의 태도. 그 따뜻한 여백이 딸을 다시 웃게 했다.
나는 지금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학생 중에는 실패가 두려워 머뭇거리는 이도 있고, 진로의 문 앞에서 길을 잃는 이도 있다. 그럴 때마다 그래도 그냥 가야 하지 않겠냐고 말하곤 했다. 주저앉지 않도록 돕는 것이 어른의 몫이라 믿었던 걸까? 성의가 없었던 걸까?
고백건대, 그들의 마음에 깊이 다가가지 못했고 힘든 마음을 헤아리기에는 내 품이 작았다.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저 이렇게 말해도, 저렇게 말해도 상처가 되지 않을 정도로‘보편적이고 평균적인 어른’의 기준에서 말해왔던 것 같다. 새삼 미안하다.
앞으로는 관식의 말이 자주 떠오를 것 같다. 좋은 어른의 레퍼런스를 이제야 만난 기분이다. 정말로 자식이, 제자가, 후배가 빠꾸하기를 바라는 어른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빠꾸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어른도 드물다. 정말 빠꾸할까봐 그 말을 입에 올리지 못하는지도 모르겠다.
빠꾸했을 때, 짜증 낼 때, 기꺼이 신뢰의 안식처가 되어주겠다는 마음. 그 마음이야말로 누군가를 다시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힘이 아닐까. 아직 데워진 체온이 식기 전에, 이 마음을 잘 저장해 두고 싶다. 우리 학생들도 안식처를 열어둔 어른들이 곁에 있다고 믿어주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오의경 교수(문헌정보학전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