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메뉴
닫기
검색
 

여론

제 745 호 [교수칼럼]사라져가는 단어들, 머릿속 사전에 등재하자

  • 작성일 2025-03-19
  • 좋아요 Like 0
  • 조회수 5550
신범상

  방송에서 고등학생들의 문해력을 테스트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한 학생이 제시된 단어를 설명하고 다른 학생이 맞히는 게임이었다. ‘존함’이 나오자, 난감한 표정의 학생이 머뭇거리더니 이내 ‘아주 큰 함성’이라고 설명했다. 비속어인 ‘존’과 ‘함성’의 첫 글자를 합성하여 만들어진 말이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영상을 지켜보던 출연자들의 웃음과 한숨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이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낯선 단어를 접했을 때의 해석 방식과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의 어휘력 수준을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휘력 부족으로 인한 문해력 저하는 뉴스에서도 심각하게 다뤄지고 있는 문제이다. ‘금일(今日)’을 ‘금요일’로 착각하여 과제를 제출하지 못했다거나, ‘중식(中食)’을 ‘중국 음식’으로 오해하여 한식으로 제공해 달라고 항의했다는 사례, ‘심심한 사과’에 대한 논란 등은 문해력 저하의 대표적인 예시로 자주 언급된다. ‘고지식(하다)’를 ‘높은 지식’으로, ‘선무당’을 ‘서 있는 무당’으로, ‘사흘’을 4일로 오해하는 등 청소년들이 단어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해 발생한 이야기들은 지금도 꾸준히 추가되고 있다.


  그러나 언론이 매우 ‘충격적’이라고 다루고 있는 청소년들의 어휘력 문제는 현재의 청소년들에게만 해당될까? 과거의 청소년이었던 기성세대는 언제쯤 저런 단어들을 자연스럽게 익혔을까? 어린 시절의 나에게도 ‘심심하다(마음의 표현 정도가 매우 깊고 간절하다)’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난감하고 이상한 말이었다. 옆집 할머니께서 돌아가시던 날, 어머니를 여읜 아저씨에게 아버지는 평소와 다르게 매우 느릿느릿하고 낮은, 사극에서나 나올 법한 투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르신께서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시다니, 심심한 위로를 전하네.” 이해할 수 없었다. 어린 나도 할머니가 곧 돌아가실 것을 짐작하고 있었는데, ‘갑자기’라니! 위로는 왜 또 ‘심심하게’ 하신단 말인가? 맵고 짠 음식을 좋아하시면서 왜 위로는 심심하게 하실까? ‘심심하다’를 ‘싱겁다’로만 알고 있던 내게 ‘심심한 위로’는 의미를 짐작할 수 없는 난해한 표현이었다. 어휘력이 확장되면서 자연스럽게 뜻을 익히게 되었지만, 그 순간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과거의 청소년이었던 나도 현재의 청소년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의 무지함은 드러나지 않았을 뿐.

  

  요즘 청소년들의 어휘력 저하를 우려하는 시각은 유효하지만, 이 문제를 바라보는 또 다른 접근도 가능하다. 문제의식을 환기하는 사례 중 상당수는 사용 빈도가 낮은 한자어들이다. ‘심심한 사과 또는 위로’와 같은 표현을 사용할 일은 거의 없고, ‘중식’, ‘금일’ 같은 단어들도 일상에서 접할 기회가 많지 않다. 이를 모르는 것이 반드시 문제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오히려 현대의 언어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현상일 수도 있다.


  실제로 국어사전에 등재된 단어는 수십만 개에 이르지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과거에는 쓰였으나 현재는 쓰이지 않는 죽은 말, 즉, ‘사어(死語)’, ‘폐어(廢語)’, ‘유령어(ghost words)’가 된 표제어도 많다. ‘기적(汽笛) 소리’를 ‘기적이 일어났을 때 나는 소리’라고 설명한 학생처럼, 일부 단어들이 점차 생명력을 잃어가는 것은 시대적 변화의 흐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변화의 흐름 속에서도 단어를 익히고 유지하려는 노력은 여전히 중요하다. 세상에 몰라도 되는 단어는 없다. 하나의 단어를 아는 것은 그 단어가 담고 있는 의미와 가치, 사회 문화적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다. 


  어휘력을 향상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독서와 경험이 필수적이다. 새로운 단어를 접했을 때, 단순히 뜻만 익히는 것이 아니라 사용되는 맥락까지 파악해야 한다. 단어를 활용하여 자연스럽게 말하고 쓰는 연습도 해 보자. 어렵고 어색했던 단어가 머릿속 사전에 자리 잡으며 생명력을 되찾게 될 것이다. 사라져 가는 단어라 할지라도 머릿속 사전에 등재해 두면 언젠가 적절한 순간에 빛나게 사용할 수 있다. 어휘를 확장하는 노력은 우리의 사고력을 깊게 하고 세계를 넓히는 과정이며 언어 감수성을 높이는 길이기도 하다.



계당교양교육원 방영심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