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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상

[소설 입선] 포항행 직통열차

  • 작성일 2022-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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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8349
김지현

포항행 직통열차


1


내가 탄 13호차에는 나를 포함하여 총 세 명이 탑승했다. 포항까지 직행이니 그들이 곧 나의 길동무가 될 참이었다. 승차권에는 입석으로 인쇄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나마 편히 앉아있을 만한 자리가 있는지 천천히 살펴보고 있었다.


내 눈에 가장 먼저 띈 남자는 머리가 벗겨져 두피가 훤히 드러난 중년의 아저씨였다. 정장 차림이었지만, 블레이저의 겉면엔 여기저기 실밥이 풀려있어 헤져보였고, 살짝 드러나는 셔츠의 목덜미 부분은 이미 누렇게 찌들어버려 셔츠가 보낸 세월을 짐작케 하였다. 분명 십년 전에는 근사했을 양복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모든 것들이 그에게 깔끔함이나 세련됨을 선사하기 보다는 어딘가 모르게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하였다.

그는 내가 기차에 들어설 때부터 눈길 한번 돌리지 않고 노트북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타이핑 중이었다. 나로부터 등을 돌리고 앉아있었기 때문에 내용은 볼 수 없었지만 나 역시 그에게 큰 관심이 없었으므로 그저 야심한 시각에 짬을 내어 밀린 업무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간단히 생각하고 넘어갔다.

남자는 중간 중간 간이 탁자 위에 올려둔 햄버거를 집어먹었는데, 냄새는 퍽 맛있게 났을지 몰라도 게걸스레 씹는 소리는 살짝 메스껍게 들렸다. 

하지만 그런 것들도 어쨌거나 나에겐 크게 상관이 없었다. 오히려 신경이 쓰이는 건 다른 쪽이었다.


나를 마주보는 방향으로 앉은 여자는 아저씨가 앉은 좌석보다 세 자리나 더 뒤에 있었는데, 여자의 얼굴은 나이를 어림짐작하기도 힘든 오묘함을 띄고 있었다. 누군가 나에게 그녀가 스무 살이라고 했다면 믿었을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가 나에게 그녀가 사실은 불혹이라고 정정해주었다 하더라도 아무런 의심 없이 곧이곧대로 믿었을 것이다. 그 얼굴은 왠지 이 세상 사람이 아닌듯한 느낌을 풍기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가 신경 쓰였던 진정한 이유는 눈이 마주친 순간부터 계속해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었다. 몇 번이나 눈이 마주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눈을 피하기는커녕 마치 오기가 생겨 나와 한판승부를 벌이기라도 하는 듯 더욱 또렷이 쳐다보았다.


한기를 느낀 나는 본능적으로 그녀와 가장 먼 자리를 골라 앉았다.


과연 저 여자의 정체는 무얼까.

귀신일까. 사람일까.

사람이라면 혹시 나를 아는 사람일까.

아니면 단지 내 얼굴에 뭐가 묻은 것일까.(슬쩍 얼굴을 만져보았다. 손에 묻어나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내가 있는 방향에 다른 무언가를 보고 있는 것일까.


짧은 시간동안, 피하고 싶은 잔혹한 시선을 마땅히 설명할만한 여러 가지 추측들이 나의 뇌를 훑고 지나갔지만 신통한 것은 개중 아무것도 없었다.


이윽고 열차는 출발했다. 오후 11시 20분. 예정된 시각이 되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런 심야에는 승객들이 열차를 놓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아니, 애초에 승객이라 할 만한 사람들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게다가 역에서 거의 한 시간이나 가까이 대기한 후 출발하기 때문에 여간 바보가 아니고서야 놓칠 일은 없다고 생각하면 된다.


포항을 향하여 출발한 후 아직까지도 정체모를 여자의 시선에게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나는 그녀와 애써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하였다. 이럴 때 책이라도 갖고 왔으면 좋으련만. 텅 빈 가방을 보며 공연히 내 자신이 원망스러워졌다.


포항역에 도착하게 될 예정 시각은 새벽 3시 30분.

기차의 좋은 점은 웬만해선 시간이 어긋날 일이 없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정신병자의 눈초리를 참는 것도 네 시간이면 족하고, 나로서는 그 시간에 잠이나 청해두면 그만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정체가 무엇이건 간에 결국 그녀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이라면 포항으로 향하는 네 시간동안 주구장창 나만 바라보진 못할 것이 자명했다.

한번 마음을 편안히 먹으니 얼어붙으려던 간담이 그렇게 서서히 녹아내려갔다.



2


열차가 출발하고 30분이 지난 후,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시선을 나에게서 차창으로 옮긴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여자의 자리를 엿보니 그녀는 흐리멍덩한 눈길로 덧없이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 덕분에 나는 방해받지 않고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는데, 여자로선 어디하나 예쁘다고 할 만한 구석이 없었지만 하나의 인간으로선 그럭저럭 봐줄만한 얼굴이었다.


머릿결은 푸석해서 볼품없었고 피부는 창백했으며 입술은 아무것도 바르지 않아 부르텄지만,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만큼은 어딘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계속 쳐다보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큰 눈망울에는 그녀가 무언가 매우 소중한 걸 잃은 듯 슬픔과 분노가 어려져 있었는데, 촉촉한 물기를 머금은 눈동자에 몇 분씩이나 빠져있자니 순간 옆자리로 가 그녀의 사연을 듣고 싶은 충동마저 일었다.


오랫동안 사랑했던 연인과 이별한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가족 중 한사람을 여의고 돌아가는 길일까.

아니면 연락을 받고 직접 장례를 치르러 가는 길일 수도 있겠지.


가족을 잃는다는 건, 내가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죽음에 대한 고찰을 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경험이다. 소중하다고 할 순 없지만, 분명 가치 있는 경험이긴 했다.


나의 아버지는 평생 도박과 술독에 빠져 지내다가 말년에 그 흔한 유서 한 장 남기지 않고 자살해버렸다. 스스로 방에 갇혀 모든 창문을 닫고 테이프로 틈을 막아둔 뒤 연탄불을 피워 질식해 죽어버렸는데, 아직도 우리 집 안방엔 그 때의 그 연탄 때문에 방바닥에 눌러 붙은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아버지가 죽고, 그 이듬해에 나의 어머니 역시 입원해있던 정신병원 병동 안에서 숨겨놓았던 숟가락으로 목을 그어 자살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자살 때문에 정신병원에 입원했던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한 때 도박과 관련된 사업을 운영했었는데, 초반엔 그 사업이 잘 풀려 우리에게 많은 부를 안겨다주었다. 그러나 불법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얼마 안가 경찰에 덜미를 잡혔고, 아버지의 사업 때문에 돈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이 매일 같이 우리 집 현관을 두드렸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항상 그들에게 부모님이 안 계신다고 말하곤 했다. 물론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 둘은 언제나 밖에 있었고 집을 지키는 일은 나의 몫이었다. 아마도 그 즈음에 아버지는 도박을 통해 빚을 갚기로 하고, 어머니는 지금껏 본인이 소유하던 수많은 명품들을 더 비싼 값에 팔기 위해 흥정하며 지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얼마 안가 우리가 갖고 있던 빚에 아버지의 도박 빚까지 얹어지자 어머니의 정신은 이상해졌다.


한 소설가는 자기의 어머니의 자살이 자랑스럽다고 했다. 이유인즉슨, 평생을 남편에게 속박당하고, 굴종하며 살아온 당신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유의지를 실현시킨 산물이기 때문이라는 거다.


하지만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나는 부모의 죽음이 전혀 자랑스럽지 않았다. 그 둘은 평생에 걸쳐 자유의지를 실컷 발휘해가며 살았고, 죽을 때마저도 제 멋대로 떠났기 때문이다. 둘에게 그야말로 가장 잘 어울리는 죽음이었다.


가족과 죽음, 오랜만에 그 두 주제에 대해 사색하다가 문득 내 머릿속에 야릇한 생각이 스쳤다.


저 여자, 혹시 나에게 관심이 있던 것은 아닐까.


저 여자가 결코 내 취향의 여성상이라고 말할 순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러한 가능성을 배제하진 않으니 앞서 느꼈던 불편한 시선들이 어느 정도 용서가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경계를 늦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전부터 가지고 있던 그 불안감과 함께 약간의 설렘 또한 싹트게 된 것이다.


내가 먼저 말을 걸어야 하나.

아니면 그녀가 나에게 말을 걸 때까지 잠자코 기다리고 있어야 하나.

먼저 말을 걸어야 한다면 도대체 어떤 말을 건네야 하나.


이제 내 머릿속은 30분 전과는 다른 분위기로, 그리고 10분 전과는 또 다른 이유로 바빠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자에게 먼저 말을 걸기로 한 계획은 철회하는 걸로 내 마음 속에서 결론이 났다. 여자가 내게 관심이 있다는 사실은 분명 나로서는 기분 좋은 일이었지만, 여자의 첫 인상이 워낙 최악으로 다가왔었기 때문에 그녀를 향한 나의 관심은 호기심의 수준, 그 이상을 넘어가진 않았다.



3

포항으로 출발한지 한 시간 째 접어들면서 설렘은 다시 냉정으로 뒤바뀌었다. 한참을 넋 놓고 그녀를 바라보다 다시 한 번 눈이 마주치고 만 것이다.


이전에 내가 느낀 시선의 불편함을 이번엔 역으로 그녀가 느꼈는지 불현듯 차창에서 나에게로 다시 눈길을 돌린 듯 했다.

또다시 시작된 여자의 적의어린 눈빛 덕분에 나는 생각을 고쳐먹지 않을 수 없었다. 설령 그녀가 첫눈에 나에게 이성적 매력을 느꼈다 하여도 십중팔구는 부끄러움에 힐끗 쳐다보는 것에서 끝이 나지, 저런 식으로 뚫어지게 응시하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저 눈빛은 호감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렇다.

저건 ‘살의’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고 나니, 나는 다시 몹시 불안해졌다. 결과적으로 저 여자의 정체가 첫 만남 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미친 듯이 궁금해졌다.


정신병자일까. 아니면 향간에 떠들썩한 무차별 살인을 즐기는 사이코패스인가.


최근 전국적으로 같은 수법의 살인이 벌어지고 있다는 보도가 연일 쏟아지고 있었다. 사건이 일어난 지역과 범행 장소가 매우 다양해서 경찰이 수사에 애를 먹고 있다고 하였다. 자칫 개별적인 사건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는 그 많은 범행들이 공유하고 있는 것은 단 하나, 살인 방식이었다. 피해자들은 모두 복부에 여덟 군데 자상, 목에 세 군데 자상, 그리고 왼쪽 가슴에 십자가 문양의 칼로 그어진 자국이 있었다. 경찰은 열세 구의 시신이 훼손된 부분의 공통점을 인지하고 이 사건들을 연쇄살인으로 규정지었다.

13명을 죽였다. 그것도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짧은 시간에, 서울에서 부산까지 국토를 횡단하며 죽이고 다닌 것이다. 마치 사람을 죽이기 위해 태어난 살육 기계와도 같은 행적이었다.


그녀가 만약 그 주인공이라면 많은 것들이 설명이 되었다. 


내가 그녀에게 이상함을 느낀 점은 크게 두 가지였는데, 그 중 하나는 그녀가 이용하는 승객이 거의 없는 이 야간열차를 택한 점이다. 

누군가는 그게 뭐가 이상하냐고 되물을 수 있겠지만, 이 시간에 서울에서 포항으로 가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더군다나 이렇게 저급하고 느려터진 열차를 예매하는 사람은 더욱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차를 선택했다면, 분명 급하게 출장이 잡혔다는 등의 사정이 생겨 시간에 맞는 열차를 찾다보니 어쩔 수 없이 타게 된 경우이거나 저렴하게 가기위해 탑승한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물론 집안에 일이 생겨 온 가족이 포항을 가야할 일이 생겼는데, 마땅히 운전을 할 사람이 없어서 그나마 싼 이 야간열차를 선택할 경우도 적은 확률이지만 존재하긴 하였다.

이러나저러나 가족 단위가 아닌 이상, 직장인일 수밖에 없다. 내 알량한 지식으로는 그 정도의 경우밖에 추릴 수 없었다.

그러나 둘 중 어느 경우도 그 흔한 가방하나 소지하지 않은 그녀의 차림새를 설명해주진 못하였다. 


그리고 가장 이상한 점은 낯선 사람에게 거리낌 없이 쏘아대는 바로 저 눈빛이다. 저 눈빛에 담긴 분노는 도대체 왜 나를 향하고 있는 것이며 그 분노를 과연 내가 어떻게 해소해줄 수 있는가. 그 해소법이 그저 나의 죽음만은 아니기를 바랄 뿐이었다.


굳이 살인이 아니라도 좋다. 단순히 누군가에게 해코지하기 위한 목적으로서라도 이 기차는 더할 나위없는 최적의 장소였다. 분명 그녀는 이 열차에 타 사냥감을 찾고 있었을 것이고, 그런 와중에 내가 눈에 딱 포착된 것이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만약 그녀가 내가 예상했던 대로 사이코패스이고 살인광이며 나를 다음 사냥감으로 침 발라 놓은 것이라면, 나는 저항해야 할 것이다. 나약한 영양이 표범의 송곳니를 뿌리치듯 도망가야 할 것이고, 그 도망이 실패한다면 그녀의 급소를 노려 처절히 싸워야 할 것이다. 

우선, 내가 처한 상황에서 과연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환경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기에 주변을 서둘러 둘러보았다. 같은 칸에 있는 또 다른 사람이었던 대머리 아저씨는 이미 십분 전부터 자기 자리와 그 옆 좌석을 침대삼아 곯아떨어진 상태였다. 

그렇다고 다른 칸에 사람들이 얼마나 앉아있는지도 나로서는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승무원에게 도움을 요청할까도 고민했지만, 내가 탄 기차는 열악하고 구닥다리인데다 야간열차였기 때문에 기껏 승무원이라 해봤자 기차를 운행하는 기관사밖에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가장 큰 걸림돌이 하나 남아있었는데,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선 어찌되었든 내가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섣불리 움직였다간 여자 쪽에서 어떤 돌발행동을 할지 모를 노릇이었기 때문에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저 하염없이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살인마가 나를 죽이러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사형수와 다를 바 없는 처지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쪽에서 먼저 죽으러 가고 싶진 않았다.


죽음의 공포가 내 속에서 생명이라도 얻은 듯 빠르게 구체화 되었다. 나는 너무나도 두려웠기 때문에 이전처럼 직접적으로 그녀를 쳐다볼 순 없었지만, 계속해서 나를 향해 쏘아지고 있는 살기쯤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해 그녀는 계속해서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뺐다 하는 것 같기도 하였다. 저 주머니 안에는 칼이나 송곳 같은 무기가 들어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 끔찍한 도구로 지금껏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사냥했겠지. 그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혐오감이 나를 휘감아 저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4


출발한 지 두 시간 째, 그녀가 나를 노려본지 한 시간 째 들어서자 나의 심장은 극도의 불안감과 흥분감이 뒤섞여 마구 요동치고 있었다. 박동 소리는 철륜 소리를 뚫고 멀리 있는 저 살인마의 귀에 닿기라도 할 것처럼 매우 크게 들렸다. 불현듯 나는 내 몸을 지킬 무기의 필요성을 느껴 급히 가방을 뒤졌다. 여벌옷과 짧은 밧줄, 가위와 청색 테이프가 들어있었고, 가방 맨 앞주머니엔 노트 몇 권과 필통이 들어있었다. 무기가 될 마땅한 것들이 없어 처음엔 실망하였지만, 이내 필통 안에서 작은 사무용 커터칼을 찾아 꺼냈다.


나는 계획을 세우기로 하였다. 우선 각자 열차의 끝자리, 대각선 방향으로 앉아있었기 때문에 살인마와 나의 거리는 꽤 먼 편이었다. 기차 한 칸의 거리, 좌석으로 따지자면 우리 사이의 15줄의 좌석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탄 열차는 13호차. 기관사와 가장 먼 열차였다. 승무원이 있다한들 과연 둘러보러 올지도 확신할 수 없는 돼지의 꼬리와도 같은 위치였다. 내가 앉은 자리 뒤로는 남자 화장실이 있었다. 그녀의 뒤로는 여자 화장실이 있었다. 그러니, 여자가 내 쪽으로 온다는 것은 필시 무슨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이다. 나는 나에게로의 접근을 공격시도로 간주하기로 마음먹었다.


살인마가 내 쪽으로 다가온다면, 그녀가 공격하기 전에 내가 먼저 선수를 쳐야했다. 그런 이유로 칼의 날은 빼놓은 채로 재킷 안주머니에 넣어놓았다.


우선 목을 세 번 그을 것이다. 날이 얇아 부러질 확률이 높기 때문에 날을 세워 찍는 공격은 가급적이면 피해야한다. 여자가 쓰러지면 그 틈을 타서 다시 나를 공격할 수 없도록 밧줄로 그녀의 몸을 칭칭 감아 묶을 것이다. 그리고 테이프를 찢어 그녀의 입을 막아야겠지. 괜히 아저씨가 잠에서 깬다면 내가 공격하는 중간부터 상황을 보게 될 터이니, 오해하기 십상이다.


그리고 테이프를 마저 찢어 두 눈에 붙일 것이다.


그 눈.


세 시간동안 나를 괴롭혔던 그 빌어먹을 두 눈까지 막고 나면 이제 그녀가 다시 공격할 수 있는 모든 위험이 사라진다. 그리고 그 때, 나는 내리는 것이다. 누구에게 알릴 필요 없이. 혹여나 살인마가 살아남아 내 정보를 알기라도 한다면 곤란하다.


여기까지가 내가 믿고 있는 생존의 정확한 매뉴얼이었다.



5


실행으로 옮길 기회가 찾아왔다.

그녀가 일어섰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벗어나 천천히 내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다가오는 동안 내 몸의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했다. 너무나 긴장한 나머지 나는 오른손을 재킷 왼쪽 안주머니에 넣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도 잊고 있었다. 그래서 서둘러 오른 손을 제 위치로 옮겼다.

만약 공격이 실패하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막상 거사의 순간이 다가오니, 실패했을 경우를 대비하지 못한 것이 너무도 안타까웠다. 결국 성공해야만 한다는 부담감이 더해져 나는 내 손안에 있는 칼을 더욱 꼭 쥐었다.


“저기요.”

품에서 칼을 꺼내려던 찰나에 그녀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나를 불러, 뒤에 이어지려던 내 행동은 순간 갈피를 잃고 멈춰버렸다.


그녀는 내게 무언가를 건넸다. 손을 자세히 보니 말보로 레드 담배 한 갑이 쥐어져 있었다. 뚜껑이라 할 만한 부분이 찢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내가 피우던 담배였다. 담배를 든 그녀의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아까 지나가시다가 떨어뜨리신 것 같아서 주워서 돌려드리려는데, 그 쪽이 너...”

그녀는 무언가 생각난 듯, 더 말을 하려다 도중에 멈춘 뒤 담배를 건네주었다. 그러고는 이내 잰걸음으로 황급히 원래 앉아있던 자리로 되돌아갔다.


여자는 살인마다.

앞서 일어났던 그녀의 일련의 행동으로 인해 내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나는 분명 담배를 떨어뜨린 적이 없다. 담배는 내 뒷주머니에 들어있었다. 실수로 떨어뜨릴 순 없는 위치이지만, 뒤에 있는 누군가가 슬쩍 빼가기에는 아주 좋은 위치이기도 했다. 그녀가 참으로 주도면밀하다고 생각했다. 어찌되었든, 그녀는 처음엔 나를 죽이기 위해 접근을 했을 것이고, 본인을 기다리고 있던 나의 자세와 결의에 찬 내 분위기에 짓눌려 움츠러든 것이 분명했다. 

우선 위기는 가까스로 넘긴 것 같았다. 하지만 언제 다시 공격해올지 모르니 완전히 경계를 풀 순 없는 노릇이었다. 


자리로 돌아간 여자는 나에게 오기 전과 마찬가지로 계속해서 나를 노려보았다. 그 모습은 마치 나의 조그마한 빈틈이라도 어떻게든 찾아서 파고들려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더더욱 긴장의 고삐를 바로 잡을 수밖에 없었다.



6


기차가 종착역에 다다를수록, 나는 나의 근심이 계속해서 가벼워지는 것을 쉽게 체감할 수 있었다. 마치 포항역이 내 행복의 기준점이라도 된 듯, 나의 감정 상태는 그렇게 내가 탄 열차와 함께 원점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마침내 기차는 고대하던 포항역에 도착하였다. 출발시각은 그토록 정확했음에도, 어째서인지 도착한 시각은 예정보다 37분이나 늦어졌다. 나는 누군가 나의 행동지침을 내려주기라도 한 듯, 너무도 당연하게 여자가 하차한 뒤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기차에서 내렸을 때, 그녀는 이미 출구 쪽을 향해 나보다 십 미터 정도 앞서가 있었다. 만족스러운 안전거리라 생각하고는 그 거리를 유지하며 그녀의 뒤를 밟았다. 출구 쪽에 다다르자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나를 한번 홱 돌아보더니 부리나케 달려 도망갔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이젠 완전히 안전해진 것이다. 다섯 시간 가까이 굳었던 온 몸의 힘이 풀리자 나는 그 자리에 가만히 주저앉았다.


오늘도 나는 죽을 뻔 했다.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잘 모르겠다.



나호성 (전기공학전공)

작품을 읽을 때마다 수정해도 부족한 부분이 계속 튀어나와 처음엔 자신감이 많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입선 연락을 받은 지금은 누군가 제 작품을 읽어주시고 알아봐 주셨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행복하게 다가옵니다.

이 행복함과 감사함이 훗날 제 글쓰기 여정에서 위대한 첫걸음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