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입선작] 하짓날 외 4작품
하짓날
벌써 해가 떴다. 아직도 지지 않는다.
시간이란 허공만을 지나 내게 내려닿는 걸까.
벌써 언제 이렇게 해가 뜨고 눈이 부시고
그 사이에 또 아무렇지 않게 내 한 몸 안에는
얼마나 얼마나 많은 비용이 차곡차곡 들었는가.
어쨌든 무언가를 피워내야 하는데 나는 쓸쓸해지는데,
나는 또 해를 보고 또 눈부실 내일을 기대하고
그 사이에 시간은 얼마나 얼마나 짧은 곳을 지나오고 있는가.
나는 얼만큼이나 길고 험한 길을 걸었는가.
나는 그 어떤 무엇이 아름다워서 계속,
차곡차곡 웃는가.
뚝섬공원
배터리가 없어서 폰을 두고 온다며
오직 약속장소만 정해놓은 동생
아무것도 없이 기다리는 일을 해보았다
널찍한 계단에 나 홀로 앉아 한강을 본다
끝도 없는 도로에 차들이 다닌다
멀어서 휘어졌는지 곧은지도 모르는
깔따구들이 날라다닌다
나는 꽤 오랜만에 이런 시간이다
시험은 괜찮게 봤다
봄과 여름의 딱 중간, 하늘도 흐린데
예전에는 울면서 들었던 노래가
바람이랑 귓가에 흐른다
까치는 돛단배 모양 위로 차근차근 오른다
자전거를 멈춰 세우고 머리를 묶는 여자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지나가는 얼룩고양이
다시, 시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누나, 이어폰을 뺐다
난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학원 가는 길
오래된 바닥 위에 새로 깔은 보도블럭을 보고
저 머리 위의 신호등 그 위의 먼지들을 보고
조그만 낡음을 알아채보고 거기에 이름을 지어보며
낡은 학원에 들어가서
어떤 노력들을 많이 했을 그 많은 이름들 중 하나를 눈여겨보고
가방을 내려놓을 때의 그 소리,
괜히 책상들의 나무 무늬를 비교해보며
똑같은 책상은 없네,
모든 건 낡아있는 정도를 포함해 많은 게 달라있고
쓸쓸하다는 감정을 느낄 때는 넘쳐나면서도
그 이유들은 전부 다르다고.
벌써 가을이 왔다고 구름들은 다 멀리 가버린
쓸쓸한 하늘을 보며 나는, 가디건을 여밀 수밖에 없었다.
시간 속에서는 무엇이든 아름다워져
단지 멀어져갈 뿐, 단지 쓸쓸할 뿐.
다시금 쳐다보게 되는 저 멀고도 먼 곳의 작은 구름조각,
나, 그리고 텅빈 파란 하늘이다. 그리고 이 공기.
시간이 더 지나면 더 아름다워지겠지,
이 기억도 모든 낡음도 빛바랜 색감들도.
산 아래 단차 있는 벽돌집들 다 일이층 높이에
저 안아보고 싶은 나무 기둥도, 고개를 끄덕여주길.
그렇게 내 짐을 조금 들어주길, 바라본다.
수시 끝난 날
시험이 끝났다.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결과는 글쎄,
과정이 더 중요하다 했지만
글쎄, 글쎄...
어쨌든 난 퍼즐을 맞추러 갈 거야.
남자친구가 데려다준다는 길.
얼굴만 봐도 즐거워서
아무래도 시험 생각은 저 멀리멀리
나, 대학 갈 수 있을까?
반년만 있으면 내가 어른이라는데
응, 거짓말 아니야
나, 너랑 결혼은 꼭 하고 싶은데.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네.
아직은 내 성적도, 내 대학도.
너와의 미래도 내 미래도.
난 가진 것도 하나 없는 것 같아.
그러나 우린 같이 걷고 있네,
비가 오지 않는 장마철.
얼굴만 봐도 즐거워서
다시 걱정은 저 멀리멀리
나, 너랑 같이 있을래.
걱정은 많아도 네가 좋으니까.
미래는 저 멀리멀리여도
너는 더 가까이가까이.
어른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
외국으로 대학을 간다는 내 친구.
공부 때문에 힘들지?
그래도 할 만하지 뭐.
얄리얄리 얄라셩
청산에 살어리랐다
이 시를 읽고 울었던 적이 있다지
그랬던 나는 이제 대학교에 간다.
너랑 내가 12살 때 만났던가.
그땐 공 하나만 있어도 행복했는데.
대학 가서도 행복할 거야, 라는 너.
하지만 어른이 되고 싶지는 않은걸.
껍데기로는 알 수 없는 나이테.
더 단단해지는 게 아니야.
어차피 안쪽의 나약함은 그대로야.
어른이라고, 나이테가 달라지냐?
우리는 점점 크게, 크게 웃는다.
야, 우리가 어른이라니!
이제 술도 사먹을 수 있는 거야.
그러다가 한숨을 푹 쉰다.
하지만 어른이 되고 싶지는 않은걸.
너나 나나, 준비가 되긴 한 걸까.
가서도 잘 지내.
잘 지내야지.
여름밤의 산책, 그때처럼
나란히 서서 바람이 부는대로
시간이 가는대로
우리는 이제 어른이 된다.
<소감>
시 부문에서 입선할 줄은 몰랐는데 뜻깊은 상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많은 것을 느끼고 많은 것을 쓰는 사람으로 살겠습니다.
이정민 (생명공학전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