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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상

[시 입선작] 하짓날 외 4작품

  • 작성일 2024-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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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4013
김현지

하짓날



벌써 해가 떴다. 아직도 지지 않는다.

시간이란 허공만을 지나 내게 내려닿는 걸까.

벌써 언제 이렇게 해가 뜨고 눈이 부시고

그 사이에 또 아무렇지 않게 내 한 몸 안에는

얼마나 얼마나 많은 비용이 차곡차곡 들었는가.

어쨌든 무언가를 피워내야 하는데 나는 쓸쓸해지는데,

나는 또 해를 보고 또 눈부실 내일을 기대하고

그 사이에 시간은 얼마나 얼마나 짧은 곳을 지나오고 있는가.

나는 얼만큼이나 길고 험한 길을 걸었는가.

나는 그 어떤 무엇이 아름다워서 계속,

차곡차곡 웃는가.






뚝섬공원



배터리가 없어서 폰을 두고 온다며

오직 약속장소만 정해놓은 동생

아무것도 없이 기다리는 일을 해보았다

널찍한 계단에 나 홀로 앉아 한강을 본다


끝도 없는 도로에 차들이 다닌다

멀어서 휘어졌는지 곧은지도 모르는

깔따구들이 날라다닌다

나는 꽤 오랜만에 이런 시간이다


시험은 괜찮게 봤다

봄과 여름의 딱 중간, 하늘도 흐린데

예전에는 울면서 들었던 노래가

바람이랑 귓가에 흐른다


까치는 돛단배 모양 위로 차근차근 오른다

자전거를 멈춰 세우고 머리를 묶는 여자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지나가는 얼룩고양이

다시, 시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누나, 이어폰을 뺐다

난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학원 가는 길



오래된 바닥 위에 새로 깔은 보도블럭을 보고

저 머리 위의 신호등 그 위의 먼지들을 보고

조그만 낡음을 알아채보고 거기에 이름을 지어보며

낡은 학원에 들어가서

어떤 노력들을 많이 했을 그 많은 이름들 중 하나를 눈여겨보고

가방을 내려놓을 때의 그 소리,

괜히 책상들의 나무 무늬를 비교해보며

똑같은 책상은 없네,

모든 건 낡아있는 정도를 포함해 많은 게 달라있고

쓸쓸하다는 감정을 느낄 때는 넘쳐나면서도

그 이유들은 전부 다르다고.


벌써 가을이 왔다고 구름들은 다 멀리 가버린

쓸쓸한 하늘을 보며 나는, 가디건을 여밀 수밖에 없었다.

시간 속에서는 무엇이든 아름다워져

단지 멀어져갈 뿐, 단지 쓸쓸할 뿐.

다시금 쳐다보게 되는 저 멀고도 먼 곳의 작은 구름조각,

나, 그리고 텅빈 파란 하늘이다. 그리고 이 공기.

시간이 더 지나면 더 아름다워지겠지,

이 기억도 모든 낡음도 빛바랜 색감들도.

산 아래 단차 있는 벽돌집들 다 일이층 높이에

저 안아보고 싶은 나무 기둥도, 고개를 끄덕여주길.

그렇게 내 짐을 조금 들어주길, 바라본다.






수시 끝난 날



시험이 끝났다.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결과는 글쎄,

과정이 더 중요하다 했지만

글쎄, 글쎄...


어쨌든 난 퍼즐을 맞추러 갈 거야.

남자친구가 데려다준다는 길.

얼굴만 봐도 즐거워서

아무래도 시험 생각은 저 멀리멀리


나, 대학 갈 수 있을까?

반년만 있으면 내가 어른이라는데

응, 거짓말 아니야

나, 너랑 결혼은 꼭 하고 싶은데.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네.

아직은 내 성적도, 내 대학도.

너와의 미래도 내 미래도.

난 가진 것도 하나 없는 것 같아.


그러나 우린 같이 걷고 있네,

비가 오지 않는 장마철.

얼굴만 봐도 즐거워서

다시 걱정은 저 멀리멀리


나, 너랑 같이 있을래.

걱정은 많아도 네가 좋으니까.

미래는 저 멀리멀리여도

너는 더 가까이가까이.







어른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

외국으로 대학을 간다는 내 친구.

공부 때문에 힘들지?

그래도 할 만하지 뭐.


얄리얄리 얄라셩

청산에 살어리랐다

이 시를 읽고 울었던 적이 있다지

그랬던 나는 이제 대학교에 간다.


너랑 내가 12살 때 만났던가.

그땐 공 하나만 있어도 행복했는데.

대학 가서도 행복할 거야, 라는 너.

하지만 어른이 되고 싶지는 않은걸.


껍데기로는 알 수 없는 나이테.

더 단단해지는 게 아니야.

어차피 안쪽의 나약함은 그대로야.

어른이라고, 나이테가 달라지냐?


우리는 점점 크게, 크게 웃는다.

야, 우리가 어른이라니!

이제 술도 사먹을 수 있는 거야.

그러다가 한숨을 푹 쉰다.


하지만 어른이 되고 싶지는 않은걸.

너나 나나, 준비가 되긴 한 걸까.

가서도 잘 지내.

잘 지내야지.


여름밤의 산책, 그때처럼

나란히 서서 바람이 부는대로

시간이 가는대로

우리는 이제 어른이 된다.






<소감>

  시 부문에서 입선할 줄은 몰랐는데 뜻깊은 상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많은 것을 느끼고 많은 것을 쓰는 사람으로 살겠습니다.

이정민 (생명공학전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