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가작] 새의 길 외 7작품
[새의 길]
하늘을 가르는 비행기 꼬리에
새들의 기억이 찢어진다
길 잃은 바람 속에서
새들은 비틀거리다 추락한다
흙에 묻힌 날개만이
옛 노래를 기억하며 썩어간다
부서진 하늘길 위로
소리 없는 계절이 지나간다
[흔적]
새벽, 빈 커피 잔을 본다
벽에 남은 갈색 자국이
구름처럼 퍼져 있다
커피는 사라지면서도
흔적을 남겼다
나는 살아가면서 무엇을 남겼나
손끝으로 벽을 문지른다
잔은 깨끗해졌지만
갈색은 손가락에 스며들었다
물로 씻어내고
다시 바라본다
흔적은, 여전히 그대로다
[가을비]
비가 단풍을 무너뜨리고 있다
여물지 못한 가을이 힘없이 흩어진다
앙상해진 나무에 흔들리는 붉은 심장
우산을 씌워줄 사람은 없는 모양이다
[일상]
책상 위, 펜 끝이 종이에 닿았다가
멈춘다
더 이상 쓰여지지 않는 문장이
공중에 떠 있다
눈앞의 책장은 꽉 차 있지만
읽지 않은 책들이
내 손을 기다린 채 묵묵히 자리를 지킨다
넘기지 못한 페이지는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다
창문 너머로 빛이 스며들어
책장 위에 머무르지만
빛은 더 이상 새롭지 않다
모든 게 익숙해질 때쯤
시간도 속도를 잃는다
머릿속을 비우려 고개를 들어보지만
눈앞의 문장들이 흩어지고
나는 다시 펜을 쥐었다가
그대로 내려놓는다
[그늘진 낮]
쏟아지는 한낮의 빛
차가운 눈이 나를 눌러 온다
도시를 뒤덮은 빛은
그림자조차 삼켜버렸다
발밑의 열기 속, 머물 곳을 잃고
나는 그늘을 찾아 발걸음을 옮긴다
눈을 감아야만 닿을 수 있는 곳,
숨 쉴 틈이 남아 있는 그곳은 어디에
[눈먼 바다]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
그것은 파도가 아니었다
바다를 잠식한
길 잃은 물고기들의 신음
침묵만 남은 깊은 물속
밤이 내려앉아도
등대의 빛이 눈을 찌른다
[잃어버린 숲]
숲은 이제 하늘에 닿지 못한다
그늘진 나무들 사이로
메아리는 사라져버렸다
새벽이 올 때마다
나무들은 고개를 떨구고
바람은 길을 잃은 방랑자가 된다
[새벽이란 시간]
새벽이라는 시간은 참 이상하다. 창밖의 불빛이 어둠 속에서 깜빡이고, 그 사이로 무언가가 손끝에 스치듯이 떠오르다 사라진다. 똑바로 서 있는 이 현실이 어딘가 분명하지 않다. 선명해 보이면서도 닿을 듯 닿지 않는, 마치 안개 속에 휩싸인 도시 같다. 어딘가로 이끌리는 듯한 느낌, 마치 깨어 있는 이 순간에도 꿈속에 빠져드는 기분은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을 것 같다가도, 결국 모양도 없이 흩어져버린다. 하나씩 떠오르는 감정과 기억이 섞이면서, 나는 내 몸과 마음이 뿌리째 흔들리는 것을 느낀다. 공기는 차갑고, 정적은 너무 깊다. 이 고요한 틈새 속에서 자꾸만 스치는 생각들은 또렷하지 않다. 하지만 그저 머물러 있고 싶은 마음이 든다. 여기에 있다면, 눈을 뜬 채 하늘을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아서.
[빈 강의실]
바람이 스쳐간 강의실,
뒤엉킨 책상과 의자들이 남아 있다
어제 떨어진 잉크 자국은
아직도 바닥에 마른 채 눌러붙어 있다
캠퍼스 구석, 멈춘 발걸음 사이로
조용히 묻는다
이곳에 머물 자격이 있을까?
멀리서 울리는 교수의 목소리는
창틈으로 스며드는 햇살처럼 희미하고
내 손끝은 그 빛을 잡지 못한다
가방 속 공책은 빈 페이지로 무겁고
강의는 지나가지만
나는 그 흐름 속에 녹아들지 못한다
단어들이 나를 비껴가고
의미는 먼지처럼 부서져
눈동자 위로 스쳐 지나간다
모든 것이 흐려지는 걸 바라보며
나는 말없이 고개를 숙여 발끝을 본다
<소감>
유독 새벽에 깨어있는 시간이 많은 한 해 였습니다. 새벽에는 허무라는 감정이 내려앉아 마음을 좀먹곤 합니다. 그 때 떠오른 생각들을 글로 표현해봤습니다.
이지훈 (문헌정보학전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