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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상

[시 가작] 새의 길 외 7작품

  • 작성일 2024-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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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4163
김현지

[새의 길]


하늘을 가르는 비행기 꼬리에

새들의 기억이 찢어진다


길 잃은 바람 속에서

새들은 비틀거리다 추락한다


흙에 묻힌 날개만이

옛 노래를 기억하며 썩어간다


부서진 하늘길 위로

소리 없는 계절이 지나간다


[흔적]


새벽, 빈 커피 잔을 본다

벽에 남은 갈색 자국이

구름처럼 퍼져 있다


커피는 사라지면서도 

흔적을 남겼다

나는 살아가면서 무엇을 남겼나


손끝으로 벽을 문지른다

잔은 깨끗해졌지만

갈색은 손가락에 스며들었다


물로 씻어내고

다시 바라본다

흔적은, 여전히 그대로다


[가을비]


비가 단풍을 무너뜨리고 있다

여물지 못한 가을이 힘없이 흩어진다

앙상해진 나무에 흔들리는 붉은 심장

우산을 씌워줄 사람은 없는 모양이다 




[일상]


책상 위, 펜 끝이 종이에 닿았다가

멈춘다

더 이상 쓰여지지 않는 문장이

공중에 떠 있다


눈앞의 책장은 꽉 차 있지만

읽지 않은 책들이

내 손을 기다린 채 묵묵히 자리를 지킨다

넘기지 못한 페이지는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다


창문 너머로 빛이 스며들어

책장 위에 머무르지만

빛은 더 이상 새롭지 않다

모든 게 익숙해질 때쯤

시간도 속도를 잃는다


머릿속을 비우려 고개를 들어보지만

눈앞의 문장들이 흩어지고

나는 다시 펜을 쥐었다가

그대로 내려놓는다


[그늘진 낮]


쏟아지는 한낮의 빛

차가운 눈이 나를 눌러 온다


도시를 뒤덮은 빛은

그림자조차 삼켜버렸다


발밑의 열기 속, 머물 곳을 잃고

나는 그늘을 찾아 발걸음을 옮긴다


눈을 감아야만 닿을 수 있는 곳,

숨 쉴 틈이 남아 있는 그곳은 어디에





[눈먼 바다]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

그것은 파도가 아니었다

바다를 잠식한

길 잃은 물고기들의 신음


침묵만 남은 깊은 물속

밤이 내려앉아도

등대의 빛이 눈을 찌른다



[잃어버린 숲]


숲은 이제 하늘에 닿지 못한다

그늘진 나무들 사이로

메아리는 사라져버렸다


새벽이 올 때마다

나무들은 고개를 떨구고

바람은 길을 잃은 방랑자가 된다


[새벽이란 시간]


새벽이라는 시간은 참 이상하다. 창밖의 불빛이 어둠 속에서 깜빡이고, 그 사이로 무언가가 손끝에 스치듯이 떠오르다 사라진다. 똑바로 서 있는 이 현실이 어딘가 분명하지 않다. 선명해 보이면서도 닿을 듯 닿지 않는, 마치 안개 속에 휩싸인 도시 같다. 어딘가로 이끌리는 듯한 느낌, 마치 깨어 있는 이 순간에도 꿈속에 빠져드는 기분은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을 것 같다가도, 결국 모양도 없이 흩어져버린다. 하나씩 떠오르는 감정과 기억이 섞이면서, 나는 내 몸과 마음이 뿌리째 흔들리는 것을 느낀다. 공기는 차갑고, 정적은 너무 깊다. 이 고요한 틈새 속에서 자꾸만 스치는 생각들은 또렷하지 않다. 하지만 그저 머물러 있고 싶은 마음이 든다. 여기에 있다면, 눈을 뜬 채 하늘을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아서.

[빈 강의실]


바람이 스쳐간 강의실,

뒤엉킨 책상과 의자들이 남아 있다

어제 떨어진 잉크 자국은

아직도 바닥에 마른 채 눌러붙어 있다


캠퍼스 구석, 멈춘 발걸음 사이로

조용히 묻는다

이곳에 머물 자격이 있을까?


멀리서 울리는 교수의 목소리는

창틈으로 스며드는 햇살처럼 희미하고

내 손끝은 그 빛을 잡지 못한다


가방 속 공책은 빈 페이지로 무겁고

강의는 지나가지만

나는 그 흐름 속에 녹아들지 못한다


단어들이 나를 비껴가고

의미는 먼지처럼 부서져

눈동자 위로 스쳐 지나간다


모든 것이 흐려지는 걸 바라보며

나는 말없이 고개를 숙여 발끝을 본다











<소감>

  유독 새벽에 깨어있는 시간이 많은 한 해 였습니다. 새벽에는 허무라는 감정이 내려앉아 마음을 좀먹곤 합니다. 그 때 떠오른 생각들을 글로 표현해봤습니다. 


이지훈 (문헌정보학전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