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당선작] 겨울 숲 외 5작품
겨울 숲
머리 흰 편백숲에 겨울비가 오고 있다
삼월로 가기에는 아직 이른 날씨인데
어제의 풍경을 지우듯
두려움 없이
비는 종일 내린다
쌓인 눈을 지울 때마다
찰나의 고요를 붙잡는 저 수부의 울음
비가 내릴수록 귀는 아득해지고
나는 길 없는 세상에 발이 푹푹 빠지도록
어디로 가야 할지 이리저리 흔들렸다
다시 단단해지고 싶어
떠나 온 길 위에서
수척한 겨울 숲에서
잠시 나를 놓아보는 시간
겨울 숲은 말이 없다
만추
가을의 귀를 가지고 있는
낙엽들이 소리 없이 쌓입니다
꽃잎처럼, 눈처럼
발걸음이 무거운 사람들을 위해
깔아놓은 것만 같은
잎들은 각자의 속도로 말라갑니다
바람이 나뭇가지를 뒤흔들고
나뭇가지는 떠난 잎들을 잊은 듯
덤덤하게 서 있습니다
점차 비어가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사람들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으려는 듯
옷깃을 여미고 걸어갑니다
정적이 사람들 사이로 지나갑니다
다시 못 올 오늘
한 점의 떨림도 없이
라피도포라
밀림 속 라피도포라는 상생의 식물이다
아래쪽 잎을 위해
제 몸에 스스로 많은 구멍을 내어
빛을 나눠 준다고 한다
가만히 그 잎을 보고 있으면
아버지의 얼굴이 보인다
가장이라는 중심을 세우기 위해
생의 어둠을 껴안고 사시는 아버지,
아버지는 60이 넘어서도
혈관을 닮은 골목길을 매일 일찍 나선다
아버지 등에 매달린 눈동자가 여럿이어서
사계절 내내 아버지 몸에 흐르는
땀방울은 빗물처럼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숨이 목에 차오르는 시간들은 계속되었고
점점 지쳐가던 아버지는 종종
내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진
아무리 힘들어도 일을 계속해야만 한다고 했다
밖에서는 뗄 수 없는 비닐처럼
그 말은 내 안의 창에 다닥다닥 붙었다
때로는 숨을 못 쉴 정도로 체할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자주 눈에 밟혀서
나는 오늘도 라피도포라 화분을
햇살 가득한 창가로 옮기고 있다
노인과 의자
오늘도 편의점 앞 의자에 한 노인이 앉아 있다
노인은 비 오는 날만 빼곤 늘 같은 자리에서
흔들거리는 의자에 앉아
몸의 균형을 맞추고 있었다
멀쩡한 의자도 많은데
굳이 그런 의자에 앉는 것이 의아했으나
노인은 그러거나 말거나
퀭한 눈으로 지나는 사람들을
쳐다보는 것으로 하루를 연다
노인은 어쩌면 기울어진 자신의 삶을
바로잡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디서부터 어긋난지도 모르겠고
그렇다고 쉽게 놓아버릴 수 없는 삶을
검게 주름진 그의 얼굴과 굽은 등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흔들리는 의자처럼
언제가 봄날이었는지도 모를 만큼
삐걱거리는 생이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이
더 곤혹인 노년의 비루한 생이
흔들리는 의자에 앉아 마른기침을 쏟아낸다
노인은 듬성듬성한 머리칼을 쓸어보며
자신이 처한 척박한 삶의 길을 빠져나가고 싶었는지
바람에 흩날리는 벚꽃잎을 바라보다
조금의 눈물을 보이는 듯했다
때늦은 반성문을 썼다가 지우는 봄날
녹슨 쇠못처럼
그렇게 노인의 하루가 또 저물어 가고 있다
빈집
할매 마저 떠난 집에 눈이 자꾸 내린다
젖은 장작 두께만큼
켜켜이 쌓이는 눈
올해도 감나무 혼자 빈집을 지켜 섰다
가지 위에 떨고 있는 잘 익은 홍시 몇 알
바람이 불어 시린 건지, 눈 이불이 좋아선지
움찔움찔 속살 떨다
마침내
내려앉는다
붉은 낙관 찍는다
<소감>
어릴 적, 집에 있던 작은 문학 전집들을 읽으며 영감을 받아 글과 시를 즐겨 쓰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그때는 부모님께 자랑하기도 하고, 백일장 대회에 나가며 글쓰기에 대한 설렘과 열정을 키웠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분주한 일상 속에서 글과 시를 자연스럽게 잊고 지냈습니다.
그러다 2021년, 군대에서 야간 당직 근무를 서던 어느 날 밤, 밤하늘을 바라보며 느낀 몽롱한 고요 속에서 작은 수첩에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특별한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마음을 정리하고 생각을 담아두는 과정이 즐거웠습니다. 그때의 작은 시도들이 쌓여 지금 이 순간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앞으로의 삶도 소중히 기록하며, 그 모든 순간을 하나하나 시로 녹여내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김대현 (지능데이터융합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