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메뉴
닫기
검색
 

FEATURE

제 3 호 꿈을 좇는 사람들

  • 작성일 2022-09-08
  • 좋아요 Like 1
  • 조회수 11271
주유라

꿈을 좇는 사람들


202010321@sangmyung.kr편집장 주유라


다가가려 하면 멀어지고, 그래서 관둬야겠다 싶으면 꼭 가까워지는 꿈이 당신에게 있는가?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빛이 난다고들 한다. 강렬한 열망으로 꿈을 좇는 사람, 그 사람들에게는 꼭 시련과 풍파가 함께 한다. 영화 인사이드 르윈의 르윈은 자신이 꼭 이루고 싶은 그 무엇 앞에서 끊임없이 좌절을 겪는 사람이다. 이 영화는 포크송 가수를 꿈꾸는 르윈의 여정을 다룬 이야기이다. 르윈은 아주 작은 가게에서 적은 돈을 받고 노래하는 포크송 가수이다. 그런 르윈은 유명한 포크송 가수가 되고자 유명 소속사 사장에게 자신의 음악을 들려주기 위해 추운 겨울에 먼 여정을 떠난다.


영화 인사이드 르윈을 보게 된 계기는 단순했다. 포스터에 고양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고양이는 단지 귀여움이나 주연을 능가하는 조연 정도를 담당하는 역할이 아니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어떤 영화를 보면 고양이를 영화에 영리하게 이용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가끔 마음이 씁쓸할 때가 있다. 광고에 아기나 동물을 넣으면 효과가 좋다는 말이 떠올라서다. 물론 고양이의 등장에 애묘인의 가슴은 뛴다. 하지만 고양이를 물건처럼 갖다 놓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들면 딱딱한 의자에 앉은 기분을 느낀다. 고양이를 이용한 작품을 보는 것은 숨돌리고 쉬었다 가기에 좋지만, 어딘가 어색한 자세로 앉아있는 기분을 느끼게 만든다. 어깨 근육과 척추와 엉덩이뼈 곳곳에 단단한 힘이 들어간 사람처럼 말이다. 그러나 인사이드 르윈의 고양이는 다른 작품에서의 고양이들과 조금 다르다.


영화의 초반에 등장한 고양이는 고양이의 역할을 해낸다. 고양이답게 예상치 못한 변수를 가져오거나, 날렵한 몸으로 뛰어다니다가 말랑한 몸으로 르윈의 품에 안겨있기를 반복한다. 여기까지 고양이의 역할은 귀엽고 따뜻하고 사랑스럽고 말랑말랑하며 예측 불가하게 구는 것이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될수록 고양이에게 새로운 의미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르윈은 우연히 남의 집고양이 한 마리를 떠맡게 되고, 고양이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런데 고양이는 잊을 만하면 르윈의 앞에 등장한다. 잡으면 사라지고 버리면 등장하는 것이다. 몇 킬로미터를 걸어 고향을 찾아온 고양이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의 포스터가 작중에 등장하는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고양이는 고양이라는 본질은 그대로인 채 형태를 바꿔가며 르윈의 마음을 은근히 흔들어댄다. 르윈에게는 잃어버린 수컷 고양이가 있지만, 르윈은 곧 그 고양이를 닮은 암컷 고양이를 만나기도 하며, 그 고양이를 버리자 다리 다친 고양이가 또다시 르윈의 앞에 등장한다. 그리고 처음에 잃어버린 수컷 고양이는 다시 르윈에게 돌아온다.


르윈은 끊임없이 잃어버린 고양이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다 창밖에 지나가는 고양이를 보고 자신이 잃어버린 고양이라 착각하고 잡아 온다. 잃어버린 고양이를 찾았다며 기뻐하지만, 그 고양이는 사실 잃어버린 고양이를 닮은 다른 고양이었다. 르윈은 그 사실을 알고도 고양이를 챙긴다. 사람들은 고양이를 꼭 껴안고 지하철을 타고다니는 르윈을 뚫어져라 바라보기도 하고, 누군가는 르윈에게 게이 같다고 조롱한다. 르윈은 그런 말에 전혀 개의치 않고 고양이를 들고 다닌다. 어떤 책임감, 생명 존중, 사명 의식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냥 있으니까 데리고 다니는 것이다. 그에게 고양이는 그냥 고양이다. 사랑하는 고양이가 아니라 어느 순간부터 같이 있게 된 고양이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굳이 버릴 필요는 없지 않은가?’ 세상에 처음 태어나 눈을 떴을 때 왜 내게 눈이 달렸는지 의심하지 않았듯이 말이다.


르윈은 포크송 가수로 인정받고 싶었다. 그래서 먼 길을 뚫고 유명한 소속사의 대표에게 노래를 들려주러 갔다. 돌아온 말은 상업적으로 가치가 없다는 말이었다. 몸 뉠 곳을 향해 돌아가는 길에 르윈의 모습은 만신창이다. 피곤함, 무기력함, 버거움, 서러움이 중력처럼 그를 붙잡고 아래로, 아래로 잡아당긴다. 그때 르윈은 고양이를 버리게 된다. 앞으로도 계속 마음에 담아두고 후회할 것을 알면서, 고양이의 갸우뚱한 표정을 잊지 못하리란 것을 예감하면서 말이다. 르윈의 처지에서 고양이를 데리고 다니는 일은 과분했을 것이다. 르윈에게는 돈도 희망도 없었기 때문이다. 고양이가 죽거나 말거나, 어차피 우연히 주운 길고양이였으니 마음 쓸 것 없지 않은가. 하지만 르윈의 마음은 편치 않다.


르윈이 잃어버린 고양이는 아무렇지 않게 스스로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몸을 길쭉하게 늘이고는 야옹하고 운다. 돌아온 고양이를 보며 르윈과 관객은 이상한 감정이 든다. 놀랍고 허무하기도 하고, 짜증이 나면서 다행이기도 하다. 르윈은 다시 작은 포크송 카페의 무대에 올라 노래한다. 다시 원점에서 노래를 부르기까지 르윈은 지난한 길을 견뎠고 꼴통 같은 자신의 추함을 견뎠다. 거지 같은 생활과 추운 바람과 무엇하나 풀리지 않는 일을 견디기도 하였다. 이 모든 것을 견디려고 마음먹은 적도 없는데도 견딘 것이다. 르윈이 그 모든 지리멸렬함을 거쳐 다시 작은 무대에서 포크송을 부를 때 르윈의 눈빛은 누구보다 많이 빛난다. 르윈은 자의로든 타의로든 포크송을 떠날 수 없었다. 포크송을 때려 치려고 마음먹어봤자, 돌고 돌아 자신에게로 오는 고양이처럼 포크송은 그에게 꼭 달라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르윈에게 고양이가, 또는 포크송이 어떻게든 르윈의 곁으로 돌아왔듯이, 열렬히 원하는 그 무엇은 다양한 모양으로 변신해가며 나에게로 다가온다. 열렬히 무언가를 원하다 보면, 그것이 내 신체 부위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대단한 작가가 되겠다고 마음을 부풀리기 전에 그저 글을 매일 쓸 때, 대단한 피아니스트가 되겠다고 다짐하기도 전에 그저 몇 시간이고 피아노를 치고 있을 때가 바로 그저 그 꿈을 묵묵히 지니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체감하는 순간이다.


포크송은 르윈으로부터 가까워지거나 멀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노래하다 벌컥 서럽고 화가 나도 다음날이면 노래했고, 퇴짜를 맞고 와서도 노래했다.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는 듯이 르윈의 곁에는 여전히 포크송이 있다. 모든 것이 르윈을 바닥으로, 바닥으로 무너뜨려도 르윈의 포크송은 아무런 표정 없이 제자리를 지킨다. 돌고 돌아 다시 포크송이다. 문득 모든 고양이가 제자리로 돌아갔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고양이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오늘은 아주 고단한 하루였어.” 꿈을 좇는 르윈도 거리를 헤맨 고양이도 모두 그저 다시 삶을 향해 걸어간다. 제자리로 돌아간 그들은 깊은 단잠을 잘 것이다. 다시 돌아간 일상이 고작 서러운 날의 연속일지라도 멈출 수 없다. 날이 밝으면 기지개를 켜고 어제보다 개운한 새 하루를 보낼지도 모르니 말이다. 고양이로 태어난 고양이는 고양이의 삶을 살아낼 뿐이다.


르윈에게 고양이는 마치 열렬히 닿고 싶어도 닿기 어려운 꿈과 같은 존재였다. 만날 듯싶으면 멀어지고, 그래서 포기하려고 하면 어느 순간 품 안에 들어오는 고양이처럼, 그렇게 꿈은 당신으로부터 가까워졌다 멀어지기를 반복할지도 모른다. 놓을 수 없이 열렬한 꿈이 있다면, 분명 그 꿈 때문에 가끔은 추해지고 지치는 날이 오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지리멸렬하는 과정을 거치고서야 다시 제자리에 돌아와 부르게 되는 포크송에는, 진하게 빛나는 눈빛이 담겨있을지도 모른다. 고양이가 제 운명을 알고 제자리로 돌아오듯이, 꿈은 분명 당신의 곁을 맴돌고 있을 것이다. 꿈을 꾸고 노래하는 당신의 눈빛이 더욱 빛나게 될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