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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TURE

제 3 호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할 수 있는 용기

  • 작성일 2022-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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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8360
정지은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할 수 있는 용기


202210316@sangmyung.kr 수습기자 정지은


철학이란 무엇일까. 철학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던 나는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의 영향으로 철학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선생님의 첫 수업은 처음 느껴보는 분위기와 내용의 수업이었다. 수업 시간 맨 앞자리에 앉아 수업 진도는 어디까지 나갔는지, 숙제가 있었는지 선생님께 솔직하게 말해 장난식으로 친구들에게 비난 아닌 비난을 받는 학생들이 반마다 한 명쯤은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런 학생 중 한 명이었기 때문에 첫 수업 시간부터 졸면 안 된다는 나만의 철칙이 있었다. 그러나 그동안 접해왔던 교과서 중심의 수업이 아닌 처음 들어보는 철학적 내용의 수업에 당황했는지, 분명 흥미로운 이야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쏟아지는 졸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수업을 들으면서 점점 선생님의 수업 방식에 빠지게 되었다. 그저 선생님이 좋다는 이유로 선생님을 따라 독서 토론 동아리에 들어갔다. 한 달에 한 번 책을 읽고 각자 느낀 점을 공유하며 이에 대한 발표 자료와 보고서를 쓰는 활동을 했다. 동아리 활동을 하던 중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라는 책을 통해 소크라테스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 철학에 대해 일면식조차 없었던 나였기에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 것은 역시 쉽지 않았다. 반복하여 읽다 보니 소크라테스에 대해 점점 관심이 생겼고 곱씹어 생각할수록 새로운 사상과 생각들이 등장하면서 흥미를 느꼈다. 부원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그가 추구하는 진리와 사상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어김없이 고등학교 선생님을 따라 나 또한 소크라테스의 팬이 되었다. 그 덕분에 목표를 다지고 나만의 삶을 그려 나갈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된 것이다


소크라테스(Socrates) 그는 누구인가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5세기경 활동한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철학자이다. 학교에서 사회탐구를 선택한 학우분들이라면 한 번쯤은 분명 들어봤을 법한 이름이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에서 석공으로 일하는 아버지 소프로니스쿠스와 산파인 어머니 파에나레테 사이에서 태어난 평범한 인물이다. 그는 당시 소피스트, 쉽게 말해 자신을 지식인이라고 칭하며 자신을 스스로 똑똑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에 반대하여, 날마다 거리에서 사람들과 철학적 대화를 나누고 그들의 오류와 모순을 드러내어 무지를 스스로 깨닫도록 했다. 이를 달갑지 않게 여긴 소피스트들이 소크라테스를 청년들을 타락시킨 자로 고발했고 그는 결국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소크라테스는 직접 책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이야기는 플라톤과 같은 그의 제자들이 남긴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플라톤은 스무 살에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받으며 철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소크라테스가 사형당하는 직전까지 그의 곁을 지켰던 인물이기도 하다. 소크라테스의 죽음 이후 그는 아테네에 학원을 짓고 연구에 매진하며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다른 사람을 통해 전달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소크라테스만의 어법과 사상이 고스란히 담긴 글을 보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플라톤의 대화편과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일생을 기록한 것이기에 어디서부터가 소크라테스의 생각이고 어디까지가 플라톤의 생각인지를 분별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변명』 속 그의 사상들


무지에 대한 자각

너 자신을 알라.’ 소크라테스가 한 말로 유명해진 이 말은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을 소크라테스가 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이 말은 그리스 잠언으로 델피 신전에 새겨진 문구이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의 의미를 신탁을 통해 깨닫게 되었고, 의미를 알게 된 후 자신의 삶을 자신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무지를 깨닫도록 하는 데 전념했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무지란 대체 무엇일까. 덕을 지식이라 여긴 소크라테스를 생각해 보면 진리와 지식에 대한 무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청년들을 타락시켰다는 이유로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소크라테스의 변명』 속에서 소크라테스는 그 누구에게도 지식을 가르친 적이 없고 그저 그들이 모른다는 것을 자각할 수 있도록 질문을 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와 관련해 생각해 보았을 때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무지는 자신이 얼마나 지식을 알지 못하는지가 아니라 자신의 알음이 얼마나 얕은지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아테네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라는 신탁의 결론이 사실이 아님을 밝히던 중, 자신이 지혜롭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처음 이 부분을 보고 그래, 인정하지 않기엔 소크라테스는 스스로가 생각해도 너무나 똑똑한 사람이었을 거야.’라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잘 알지도 못하는 것을 완벽하게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과 달리,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는 점에서 신탁을 인정한 것이었다. 고로 소크라테스에게 가장 큰 무지는 스스로에 대한 무지,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에 대한 무지였던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가장 지혜로운 자라고 인정하게 된 이유를 듣고 생각이 짧았다고 느끼며 나의 무지를 깨닫고 반성하게 되었다.


산파법진리에 도달하는 방법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산파법은 문답을 주고받는 가운데 상대의 막연하고 불확실한 지식을 스스로의 힘으로 참되고 바른 개념으로 이끌어 내도록 하는 방법이다. 아이를 낳을 때, 아이를 받고 산모를 도와주는 일을 직업으로 하던 산파의 역할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상대에게 질문을 던져 스스로 무지(無知)를 깨닫게 함으로써 사물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인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요시하여 다양한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는 것을 즐겼다. 그는 스스로를 자신 어머니의 직업에 비유하여 영혼의 산파라고 자처하여 상대방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 과정을 통해 상대가 스스로 계속해서 답을 찾아 나가도록 이끌었다. 소크라테스는 용어의 개념을 정의하는 대화를 통해 상대가 무지를 깨닫게 하고, 더 나아가 스스로 묻고 대답하는 성찰적인 태도를 기를 수 있게 도왔다. 단순히 지식적인 부분이 아니라 이성의 기능까지 강조한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여러 대화편을 보면, 그는 한 용어의 개념을 가지고 오랜 시간 질문과 대화를 주고받다가도 상대방이 정확히 그 개념이 무엇인지에 관해 물을 때면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않고 바쁘다는 핑계로 자리를 떠나곤 했다. 생각해 보면 소크라테스는 정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상대방이 혼자 깊이 생각하고 그들만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도록 하는 나름의 기회를 준 것이라고 느껴지기도 한다


소크라테스의 용기

소크라테스는 법정에서 변론하며 재판과 판결이 부당하다는 것을 주장했다. 소크라테스가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에 갇힌 후 제자들과 그의 친구인 크리톤은 그를 감옥 밖으로 탈출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설령 악법이라 할지라도 시민들이 정해둔 법에 복종하는 것이 사회와의 약속, 자기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는 일이라며 탈옥 권유를 거절한다. 분명 판결과 재판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죽음으로 인도하는 현실에 수긍한 것이다. ‘변명이라는 것은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어떤 잘못이나 실수에 대하여 구실을 대며 그 까닭을 대는 것, 혹은 옳고 그름을 가려 사리를 밝히는 것을 말한다. 물론 소크라테스가 변론하고 대화하는 것이 주 내용이기는 하나 그 속에서 소크라테스의 대범함과 용기가 잘 나타난다는 점에서 책의 제목이 소크라테스의 변명이 아니라 소크라테스의 용기도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고 도는 시대우리도 소크라테스처럼 


최초의 그리스 철학자들이 자연에 관심을 집중했다면 소크라테스는 인간에 대한 진리, 철학적인 탐구에 집중했다. 사물에 대한 탐구보다는 우리 주변, 인간의 특성에 조금 더 집중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선함이라는 것은 무엇인지, 옳고 그름의 의미, 사유하는 삶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특히 자신을 반성하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명심하고 지녀야 할 덕목이라고 여긴다. 자기 자신을 반성하고 다룰 줄 아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다른 사람들을 마주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앞서 무지에 대한 자각에 관해서 이야기했던 것과 같이 자기 자신에 대한 무지,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에 대한 무지를 벗어나야 한다고 소크라테스는 주장한다.

어째서 몇 세기가 지난 소크라테스의 사상이 지금까지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분명 소크라테스가 살아왔던 시대와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시대는 확연히 다르다. 그러나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상황 자체는 별반 다르지 않다고 느껴진다. 아테네 사람들은 현란한 말솜씨로 자신의 정치적, 경제적인 이익을 얻고자 했고, 현대 사회의 모습도 비슷하다. 우리 사회는 돈, 권력을 중요시하며 그것이 학벌이 되고, 그것이 사회적 지위가 된다. 특히나 교육에서의 모습 더욱 그러하다. 아테네에서 자신이 똑똑하고 진리를 깨달았다며 스승임을 자처하는 소피스트들은 젊은이와 정치를 꿈꾸는 학생들에게 비싼 수업료를 받고 그들에게 궤변을 늘어놓았다.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며 그저 겉만 번지르르한 수단으로서의 말재주만을 가르친 것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사유하는 삶을 배워야 한다. 스스로 묻고 답하며 정직함이란 무엇인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선()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이와 같은 깨달음을 바탕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거치며 자연스레 소크라테스의 팬이 되어버린 듯하다.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떠올려 보면 사회의 기반이 되는 것은 아무래도 배움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 사회의 배움을 살펴보면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알면서도 그것에 관해 질문하지 않는 학생들이 대부분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모르는 게 생기면 질문하고, 생각하고, 궁금증을 푸는 것은 분명 당연한 것인데 말이다. 내가 무언가를 모른다는 것이 남들에게 밝혀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커서 질문을 하는 것에 대한 용기가 부족한 것이 원인이 아닐까 싶었다. 나 또한 학창 시절 수업 시간에 모르는 것이 있을 때 언제 질문을 해야 할지 타이밍만 노리다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개인의 용기도 중요하지만, 질문하는 사람을 시간을 끄는 사람, 모르는 게 있는 멍청한 사람으로 인식해서는 안 된다. 소크라테스가 거리를 거닐며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것처럼, 질문하는 사람을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아는 대단한 사람, 모르는 것을 배워나가기 위해 용기를 낸 현명한 사람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이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당연한용기를 가지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소피스트들처럼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부분이 무엇인지 모르고, 모든 것을 완벽하게 다 알고 있다고 착각한 채 세상을 살아가게 된다면 무언가를 배우고 알아가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성장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사상이 교육의 방향과 사회의 모습을 발전시키고 향상하는 데에 도움이 되길 바라며 앞으로 나아질 세상을 기대해 보는 바이다.




<참고문헌>

플라톤(1999), 소크라테스의 변명, 문예출판사.

소크라테스, 두산백과, 2022.08.08.,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14187&cid=40942&categoryId=334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