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세 1]
일본사 스터디 발제 – 유럽의 일본 진출과 기독교 전파 / 오다 노부나가 정권
201910042 홍슬기
1. 유럽의 일본 진출과 기독교 전파
- 15C후반~16C 유럽 :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이 일어나 근대 사회로 이행中
-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동지중해와 중동지역은 오스만 제국 등 이슬람 세력이 장악 → 유럽과 아시아의 중계무역 독점
- 유럽은 유럽과 아시아를 직접 잇는 새로운 항로를 개척해 무역 확대, 기독교 포교, 식민지 획득을 도모
- 1543년 포르투갈 인을 태운 중국 선박이 규슈 다네가시마에 표착한 것을 계기로 포르투갈과 무역 시작
- 다네가시마의 도주 다네가시마 도키타카 : 포르투갈 인이 가지고 있던 화승총을 구입하여 가신들에게 사용법과 제조법을 배우게 함
- 포르투갈 인 : 화승총과 화약, 중국산 생사, 견직물, 설탕, 약품을 일본산 은과 교환하여 많은 이익을 챙김
- 화승총 : 사카이, 네고로 등지에서 대량생산되어 기마전법에서 보병전법으로 전술 변화
- 1549년 예수회의 프란시스코 사비에르가 가고시마에 → 유럽의 일본 무역은 기독교 선교 활동과 일체를 이루었고 다이묘들은 선교사에게 협조 → 사비에르 교토 지역까지 포교
- 많은 선교사들이 일본에 와서 교회와 선교사 양성 학교를 세우는 등 포교 활동 벌임
- 특히 규슈를 중심으로 긴키, 주고쿠 지역의 포교가 이루어져 기독교 신자 기나이 지역에만 2만 5000여명에 달함
- 오다 노부나가 : 1569년 선교사 프로이스의 교토 거주 허락, 1576년 교토에 남만사 건립 허가, 1581년 아즈치 성 밑에 세미나리오 건립 허가 → 기독교에 대한 지적 호기심 & 불교로 대표되는 중세적 종교 권위 부정
- 히데요시 : 처음엔 기독교에 대해 비교적 관용의 태도를 보임 → 1587년 오무라 스미타다가 나가사키를 예수회에 기진한 것과 포르투갈 인이 일본인을 노예로 매매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교역은 계속 인정하지만 선교사에게 해외 추방령 내리고 나가사키 회수
- 그러나 교역과 선교가 한 몸으로 행해졌기 때문에 교역을 인정하는 한 기독교의 포교 멈출 수 없었음
- 1596년 스페인이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선교사들을 이용한다는 정보를 듣고 스페인계 프란시스코회를 중심으로 선교사와 신자 26명을 체포, 나가사키에서 처형 → 사건 배후에 프란시스코회와 예수회의 대립이 있었음
- 당시 일본 지배층 : 기독교에 경계심 가지고 있었음
2. 오다 노부나가 정권
- 오다 노부나가 : 오와리 슈고다이의 가신 오다 노부히데의 아들
- 1559년 오와리 통합, 1560년 3만의 군세를 이끌고 교토로 향하던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오케하자마에서 물리치며 다이묘로서 두각을 나타냄
- 1567년 미노의 사이토씨 멸하여 비옥한 노비 평야 획득, 1568년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하여 교토에 입성
- 계속된 통일 전쟁 : 1570년 아네가와 전투에서 아자이 나가마사와 아사쿠라 요시카게의 연합군 물리침, 1571년 강력한 종교적 권위와 경제력 자랑하던 중세적 종교권력 엔랴쿠지를 불태움
- 쇼군 요시아키 : 노부나가 세력에 대항하여 아자이/아사쿠라/다케다 가문과 연합 꾀했지만 강력한 반노부나가 세력이었던 다케다 신겐이 1573년 급사해 노부나가가 요시아키를 교토에서 추방하여 무로마치 막부 멸망시킴
- 1575년 나가시노 전투에서 대량의 총포를 이용한 전법으로 당시 최강의 기마 군단을 이끌던 다케다 가쓰요리를 물리쳐 전국 통일의 기틀을 마련
- 1576년 노부나가 자신의 권력을 상징하는 아즈치 성 건설에 착수, 1579년 완성
- 오다 노부나가 최대의 적 = 이시야마 혼간지를 정점으로 하는 잇코 잇키 세력 : 1570년 혼간지의 문주 겐뇨가 전국 문도들에게 노부나가에게 대항할 것을 명한 이후 두 세력의 싸움이 지속됨
- 1574년 이세 나가시마의 잇코 잇키, 1575년 에치젠의 잇코 잇키 평정. 1580년 이시야마 혼간지를 굴복 → 약 1세기에 걸쳐 존속한 잇코 잇키 세력 해체
- 노부나가는 중세의 정치/경제/질서/권위 부정하고 새로운 지배 질서 창출하고자 노력
- 경제 : 당시 최고의 경제도시이자 자치도시인 사카이를 지배하에 넣어 기나이의 높은 생산 력을 자신의 통제 아래에 집중.
: 교통과 유통에 장애를 초래하는 검문소 철폐하여 유통을 원활하게 함.
: 라쿠이치/라쿠자령을 내려 상인의 자유로운 왕래와 영업활동 장려
- 종교 : 엔랴쿠지와 잇코 잇키 제압하고 교토에 깊이 뿌리내린 니치렌종과 정토종 논쟁시킨 후 니치렌종을 패소시켜 탄압 > 세속권력이 종교권력보다 우위에 있음을 보여줌
: 예수회 선교사들에게는 호의적인 태도를 취하여 선교활동 지원하고 유럽과의 무역에 도 큰 관심을 보임
- 무사와 상공인의 도시 집주를 추진하여 병농분리, 조카마치 건설로 근세적 도시 창출
- 영주에게 토지의 생산량을 신고하도록 해 토지의 지배자, 경작자, 경작면적, 생산량 파악
- 노부나가의 정책들은 중세를 부정하고 근세로 나아간 선구적 정책으로 평가
- 1582년 덴모쿠 산의 싸움에서 숙적 다케다 가쓰요리 멸하고 모리 씨 정벌을 위해 교토 혼노지에 머물고 있었는데, 아케치 미쓰히데가 반역하여 노부나가를 죽임
[근세 2]
202010018 윤정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국통일
도요토미 히데요시 : 오와리 농민의 아들→노부나가에게 발탁, 장군으로 출세
노부나가의 후계자로
1. 1582년 야마지키 전투
노부나가 사망 이후 대치하던 모리와 화해, 군세를 교토로 몰아 1582년 야마지키 전투에서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승리
2.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 승리
시바타 가쓰이에 패망 + 이를 도왔던 노부나가의 셋째 아들 노부타카를 자살로 몰아넣음
→ 노부나가의 후게자가 됨
전국통일
1.이에야스 vs 히데요시
노부나가의 차남 오다 노부오의 편을 들던 도쿠가와 이에야쓰와 고마키,나가쿠테 전투를 벌임
싸움이 교착상태기 되자 화해하고 이에야쓰가 히데요시의 휘하로 들어감
2.1585년 기이 평정, 시코쿠 정벌, 조소카베 씨를 복종시킴
3. 1587년 규슈정벌, 시마즈씨 복종
4.1590년 호조 우지마사 멸망
→전국통일
오사카성 축조와 조선침략
이시야마 혼간지에 자신의 본거지로 오사카성 축조
+1586년 교토에 성곽풍의 주라쿠테이를 축조→천하의 지배자임을 나타냄
1588년 천황의 행행을 기회로 전국 다이묘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함
통일을 완성함 1591년 관백의 지위를 히데쓰구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태합으로서 전국지배와 조선침략에 전념
정명가도 요구→조선 거절→1592년 15만 대군으로 조선침략→명과의 화해교섭 결렬, 재침입→조선군과 명의 반격에 참패,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철군→히데요시 정권 붕괴
토지개혁과 세금책정
직할령과 주요 금은광산, 각지의 도시와 호상, 도로를 장악→경제적 지배 강화
전국의 토지를 동일한 자로 직접 측량→모든 토지를 4등급으로 분류
각각의 토지의 생산량을 곱하여 생산고인 고쿠타카를 정하다
토지대장에 직접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의 이름과 경작면적 등재
→한 토지에 여러사람의 권리를 인정하던 것을 부정, 일지일작 확립
→농민은 자신의 경작지 보유권을 법으로 인정받고, 세금 부담자로 확립
고쿠다카를 기준으로 다이묘에게 영지를 주고 군역을 부과
1588년 농민봉기(잇키) 봉쇄를 위해 농민이 보유하고 있던 도검등의 무기 몰수
1591년 무가에 고용된 무가봉공인이 농민이나 상인이 되는 것을 금지
→직업을 통한 신분사회 기초확립 + 농촌이 농민이 도시에는 무사와 상공인(병놈분리 완성)
아즈치 모모야마 문화
1세기에 걸친 전란으로 지역간 경제, 문화 교류 형성
+호상출현(전쟁과 교역을 이용, 전국적인 상품 경로 장악, 거액의 부 축적)
+사원세력 약화→불교적인 문화 색채가 약해짐
→이런 분위기+부와 권력이 집중된 통일전권시기→새로운 문화 탄생
=아즈치성과 후시미성의 별칭인 모모야마성을 합쳐 아즈치, 모모야마 문화라고 칭함
4가지 아즈치, 모모야마문화의 특징
1. 개방적인 분위기를 반영, 신선미+호화, 장대함
2. 현실적 현세적 성향이 강하다
3. 유럽문화의 접촉을 통해 다채로와짐
4. 미술 공예와 생활문화 영역에서 변화가 크게 일어남
성관건축
1. 교통이 편리한 ‘평지’에 위치
2. 천수를 가진 혼마루, 도루이, 해자로 둘러싸여있고 석단을 쌓아 만듦
3. 전투적 기능 + 지배의 거점으로서의 기능
이 시기의 아즈치성, 오사카성, 후시미성은 성주의 거관이자 정청으로 웅장하고 화려하게 축조→천하통일의 위세를 상징적으로 드러냄
4. 쇼인즈쿠리 형식+다미에 형식등 호화로운 장벽화로 장식
가노파 회화유파
가노 에이토쿠는 무로마치 시대에 유행하는 수묵화+일본고래의 화풍
→풍부한 색채+강력한 선묘, 웅대한 구도를 갖는 새로운 화풍
+장벽화 이외에도 신흥세력으로 등장한 도시와 서민의 생활과 풍속을 소재로 이용
사카이의 센노 리큐의 다도
와비차 방식 : 간소하고 소박, 다이묘의 보호를 받으면서 크게 유행
히데요시는 오사카 성에 황금다실
교토내리, 오사카성, 나고야성 등에 다회를 개최하는 공가나 다이묘들과 다도를 즐김
유럽문화의 접촉
시계, 안경, 화승총, 포도주, 오르골, 오르간, 비올라 등의 문물 접함
서민 사이에 흡연문화 확산
의학, 천문학, 지리학 등의 학문과 항해술, 서양화의 기법등이 전래
+서양 활자 인쇄술의 도입으로 [이솝 이야기],[헤이케 모노가타리]등의 서적 간행
임진왜란에 약탈해간 동활자를 이용하여 서적 간행, 도공들을 이용하여 도기 생산
[근세 3]
일본사 7차 스터디
202010017 윤수희
1. 에도 막부의 성립
1)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지배권 확립
· 1590년 히데요시, 호조 씨 멸망시킴. 이에야스를 간토로 이동시켜 약 250만 석을 영유하게 함.
· 1598년, 히데요시 사망 후 고다이로의 필두로 올라 조선과의 외교를 지휘하며 지배권 확립.
· 이시다 미쓰나리, 이에야스의 지배권 확대에 불만을 품고, 고니시 유키나가, 모리 데루모토, 우키타 히데이에, 시마즈 요시히로를 끌어들여 반이에야스의 군사를 일으킴. → 서
군
· 이에야스, 후쿠시마 마사노리, 가토 기요마사, 구로다 나가마사와 동맹 → 동군
· 우에스기 가게카쓰를 물리치고, 1960년 9월 세키가하라에서 전투 개시(세키가하라 전투)
·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에야스 승리. 서군에 가담한 다이묘들의 영지 몰수, 모리 데루모토 120만 석에서 30만 석으로, 우에스기 가게카쓰를 120만 석에서 47만 석으로 감봉. 이를 통해 얻은 토지를 동군의 다이묘들과 자신의 가신들에게 나눠주어 후다이다이묘 28명을 새로 세웠다.
· 도카이도와 나카센도 등 전국의 주요 가도 정비·장악. 교토, 후시미, 사카이, 나가사키 등 주요 도시와 항구를 직할지로 삼음. 오모리, 이쿠노, 도사, 이즈 등의 주요 금·은광 & 후폐 주조권 장악하여 전국적인 경제 기반 확보.
2) 막부 개설
· 1601년 : 이에야스, 서국의 다이묘와 조정을 감시하기 위해 교토쇼시다이 설치.
· 1603년 : 쇼군이 되어 에도 막부 개설. 이를 통해 전국의 다이묘에 대한 지배권 확보.
· 1605년 : 쇼군직을 아들 히데타다에게 물려줌. → 도쿠가와 씨가 쇼군직을 세습한다는 것을 알림. 오고쇼로서 슨푸에서 천하의 정치를 주관.
· 1614년 10월,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후계자 지위를 유지하면서 오사카 성에 기거하던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싸움을 일으킴. 11월, 양 진영 화해. 1615년 4월, 다시 싸움 시작. 5월, 오사카 성 함락.
· 1616년 : 이에야스, 다이묘가 거주하는 본성을 제외한 모든 지성을 파괴하라는 일국일성령을 내림. → 막부에 대항할 수 있는 다이묘들의 군사적 거점 제거, 각지의 성을 거점으로 다이묘에게 저항하려는 마사 세력 약화. → 다이묘 권력 강화.
· 무가제법도 공포 : 다이묘를 통제하는 성격을 띰. 이 법도에 의해 막부와 다이묘들 간의 사적 주종관계가 공적인 정치 관계로 전환.
· 1611년 공가중법도를 내려 공가에 대한 통제를 꾀하고, 1615년 금중병공가제법도를 제정하여 조정 통제의 기준을 마련. 이 두 법령은 다이묘와 천황 및 공가를 규정하는 일본 근세 국가의 기본법.
3) 사원과 신사 그리고 기독교
· 사원과 신사에 대해서는 막부가 사사령을 주어 국가의 안온을 기도하게 함.
· 1615년, 제종의 본산에 제종제본산법도를 내려 통제 강화.
· 1612년, 직할령에 기독교 신앙 금지령. 이듬해 전국의 기독교 신자에게 개종 명령. 1614년, 다카야마 우콘 등 300여 명의 기독교 신자를 마닐라와 마카오로 추방.
· 1616년 중국선 이외의 무역선의 기항을 히라도와 나가사키로 제한.
· 겐나의 대순교 : 1622년, 55명의 선교사와 신도가 나가사키에서 처형.
2. 막부와 번
1) 막부의 권력 강화
· 1617년 : 히데타다, 다이묘·공가·사원·신사에 영지 지배를 확인하는 문서를 발행하여, 자신이 전국 토지의 영유자임을 나타냄.
· 1619년 : 히로시마 성주 후쿠시마 마사노리를 무가제법도 중 성곽 수리에 관한 조항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신슈의 가와나카지마로 전봉. →서국 지역의 유력 도자마다이묘도 처분할 수 있을 만큼 힘을 소유하고 있음을 보여줌.
· 이에미쓰는 1633년 고쿠다카에 입각한 통일된 군역령을 내리고, 1634년 이 군역령에 따라 군역을 부과, 30여 만의 군세를 이끌고 교토에 입성했다.
· 참근교대제 제도화 : 1635년, 무가제법도를 개정하여, 다이묘의 처자를 에도에 거주시켜 인질로 삼고, 다이묘에게 에도와 영지를 1년마다 왕복하게 함. 쇼군이 교체될 때마다 다이묘에게 무가제법도를 제시하여 새로운 쇼군에 대한 충성심을 환기 시킴. 이는 다이묘에게 막대한 재정을 소모하게 했으나, 에도와 오사카 등 도시와 참근 행렬이 지나는 가도·숙역을 번영하게 했고, 도로의 발전을 가져옴.
2) 막부의 정치
· 유이 쇼세쓰의 난 : 1651년 7월, 엄격한 다이묘 통제 정책으로 발생한 다수의 ㄹ닌들과 그들로 인한 사회 불안으로 발생. 이에 막부는 로닌 발생을 막기 위해 말기 양자의 금지를 완화.
· 1664년 4대 쇼군 이에쓰나, 쇼군과 다이묘의 관계에서 쇼군의 우위, 다이묘와 가신의 관계에서 다이묘 우위를 규정.
· 5대 쇼군 쓰나요시, 1683년에 무가제법도를 개정하여 유교 의례에 입각한 상하질서를 중시하는 지배 윤리 강조. 1687년 동물애호령, 1684년 복기령 내림. 이를 통해 살생을 배제하는 사고의식을 사회 전체로 확대.
· 무력에 입각한 위압적 무단정치는 위의 여러 정책을 통해 유교에 입각한 문치 정치로 전환.
· 6대 쇼군 이에노부는 아라이 하쿠세키를 등용, 정치 혁신을 도모. 동물애호령 폐지, 화폐 개주를 통해 물가의 하락과 화폐 가치의 회복을 도모. 그러나 화폐량이 반으로 줄어 상품 유통을 위축시킴. 1711년 쇼군의 외교상 명칭을 ‘일본국대군’에서 ‘일본국왕’으로 고치고 조선의 사절에 대한 예우 간소화.